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영미 Jun 15. 2020

[캐나다]한국어 교수를 꿈꾸는 애쉴리 2

- 밴쿠버 UBC에서 만난 애쉴리 이야기

[캐나다]한국어 교수를 꿈꾸는 애쉴리

종종 애쉴리의 SNS를 방문한다. 본인이 직접 요리한 한국 음식 사진이 올라와 있다. 그 중에서 찜닭이 제일 맛있어 보였다. 애쉴리는 요리를 즐겨 한다. 밴쿠버에서도 친구들과 함께 김치를 담글 정도였다.


밴쿠버에서 친구들과 김치를 담그는 애쉴리(사진: 애쉴리 본인 제공)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맛있는 음식 또한 많이 먹어 본 사람이다. 애쉴리도 그랬다. 다양한 식당을방문하기도 하고 배달 서비스를 사용하며 한국 음식을 알아갔다. 아닌 게 아니라, 애쉴리는 나에게 배달앱 사용 방법을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이다. 2014년, 애쉴리를 한국에서 만나서 함께 찜닭을 먹었는데 애쉴리는 종종 찜닭을 시켜먹는다고 했다. 나에게는 찜닭 배달이 햄버거 배달만큼이나 생소한 때였다. 배달 방법을 물으니 애쉴리는 앱으로 배달하는 방법을 내게 알려주었다. 어쩌면 그녀는 한국에서 “먹고 사는” 방법을 나보다 더 현명하게 터득해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당시 애쉴리는 GEPIK (Gyeonggi English Program in Korea, 경기 영어 프로그램)과 SMOE (Seoul Metropolitan Office of Education, 서울시 교육청)를 통해 한국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게 됐는데, 2012년부터 2014년까지는 효동초등학교에서, 2014년부터 2016년까지는 산남초등학교에 영어를 가르쳤다(두 학교는 모두 수원에 있는 같은 동네로 매탄 2, 3동에 각각 있다).



한국에서 한복 입기를 체험한 애쉴리(사진: 애쉴리 본인 제공)


“한국어 교수가 될 거예요.”


오래 전 그녀의 꿈이 이러했기에 그녀는 학부를 졸업하자마자 대학원에 가야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 자신의 상황과 타협해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 이유로는 첫째, 학업에 대한 자신의 태도였다. 공부를 좋아했지만 세상만사에 호기심이 많은 이십 대 초반에 공부만 할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 살이에 즐거움을 느껴보고 싶었다고 했다. 둘째, 금전적인 이유였다. 대학원 입학 전에는 대출받은 학자금을 갚아야 했다.


사실 애쉴리가 UBC에 입학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취직을 하거나 직업학교에 가라고 권유하셨단다. 애쉴리는 하고자 하는 공부가 있었고, 무엇보다 한국에 대해 배우고 싶었기에 부모님을 설득해 UBC에서 대학교육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대신 학비는 애쉴리가 거의 다 준비해야 했다. 학자금 대출과 와인 농장에서 일해 번 돈으로 학비를 모두 충당했다. 애쉴리는 이 모든 과정을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한테 기대지 않고 스스로 해낸 제 자신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이렇게 애쉴리는 본인의 힘으로 집안의 유일한 대졸자가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이와 같은 이유로 한국에서 일하게 되었고, 4년이 지난 후에도 애쉴리는 한국에 더 머물고 싶어했으나 프로그램이 종료되어 캐나다로 돌아가야 했다.


2017년 9월, 고향으로 돌아간 애쉴리는 다시 와인 농장에서 일했다(그녀의 고향 캘로나(Kelowna)는 와인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생활비와 학비를 준비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이 돈을 모아 자신의 모교 UBC(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서 대학원 입학에 필요한 수업을 몇 과목 듣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는 석사 과정에 도전했다.


“한국어 교수가 될 거예요.”


오래 전 그녀의 꿈이 이러했으나 대학원에서의 전공은 영어 교육으로 정했다. 이 또한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학비였다. 고정적인 직업 없이 대학원에서 수학해야 하고, 캐나다 BC주의 생활비는 나날이 늘고, 임금은 낮아지고 있기 때문에 대학원 졸업 후 마땅한 직업을 구하지 못한다면 생활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 그녀는 이러한 자신의 금전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캐나다에서는 한국어 전공자보다 영어 전공자에게 취업의 길이 더 열려 있다. 씁쓸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그리하여 한국어 학자가 되고자 하는 젊은이가 영어 교육 석사 학위를 밟고 있으며, 대학원을 무사히 졸업하기 위해 와인농장에서도 일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애쉴리가 현실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니었다. 애쉴리는 일단 가르치는일을 좋아한다. 한국에서 초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꼈으며, 종종 SNS에서 본 그녀의 수업이 그랬다. 아이들이 애쉴리 선생님에게 보낸 영어 편지와 그녀가 아이들을 위해 애써 만든 수업 자료도 엿보았다. 아이들과 함께 한 일상 속에서 애쉴리는 그들과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또한 애쉴리의 석사 학위 논문 주제는 한국에서의 영어(콩글리쉬) 사용, 영어 열풍, 한국에서의 영어 교사 현황 중의 하나로 정할 계획이라고 했다. 애쉴리 씨의 연구는 한국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보다 안정적인 보수를 지급하는 곳에서 일하며 박사학위를 밟을 예정이라고 했다. 최종적으로 무엇을 전공하든 그녀의 목표는 “좋은 외국어 선생”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타협은 때때로 미묘한 차이로 우리를 헷갈리게 하지만,

냉혹한 현실과 자신의 꿈을 타협해 가는 이들은 힘이 있다.

가수 데뷔를 준비하며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젊은이,

단역 연극 배우로 일하며 동시에 택배 일을 하는 젊은이,

나는 이들의 힘을 믿는다.

이들은 무대를 꿈꾸기 때문이다.


나의 학생들도 무대를 꿈꾼다.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자신의 역량을 펼쳐 보이는 곳, 그곳이 바로 그들의 무대이다.

나는 한국어로 자신만의 무대를 세우는 이들을 보아 왔다.


대만에서도 그랬다.

졸업 후 한국을 가기 위해 주말 내내 화장품 가게에서 일했던 조교,

일 년에 한 번은 한국에 가야 한다며 한국행 자금을 모으기 위해 평일에도 다섯 시간씩 학원에서 일하는 학생,

한국어를 전공해 한국 기업에 취직하고 싶다며 한국어와 관련된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적은 보수를 받으며 일했던 학생,

이들은 결국, 한 발자국씩 움직이며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애쉴리도 한국어 교수를 꿈꾸며 캐나다 와인 농장에서 일하는 젊은이이다.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한국어를 혼자 끄적이던 여고생. 자신이 그려간 한국어를 보고 중국어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노노노 잇츠 코리안”을 외치던 십대 소녀는 여전히 자신의 무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 십 년 전 밴쿠버 외곽의 시낭송회 무대를 시작으로 그녀는 더 넓은 곳으로 가고 있다.



오늘도 나의 학생들은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의 상황만을 탓하지 않고

조금씩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헤매며 찾아간다.

나는 이런 젊은이들을 편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여전히 애쉴리를 위한 나의 편애중계를 진행하고 있다.



* <편애중계>는 MBC 예능 프로그램명입니다. 두 명이 한 팀을 이뤄 자신들이 편애하는 인물을 끝까지 응원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본 글의 제목은 이 프로그램명에서 왔음을 밝힙니다.

http://www.imbc.com/broad/tv/ent/BroadcastingonYourSide/



이전 06화 [캐나다]한국어 교수를 꿈꾸는 애쉴리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