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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미 Jun 14. 2020

[캐나다]한국어 교수를 꿈꾸는 애쉴리 1

- 캐나다 UBC에서 만난 애쉴리 이야기

밴쿠버 올림픽 준비가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캐나다의 상징인 단풍잎이 크게 그려진 빨간 티셔츠를 입고 다녔고, 거리마다 2010 동계 올림픽을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였다.


나는 당시 캐나다 밴쿠버에 위치한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UBC)의 아시아학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UBC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은 한국, 중국, 대만, 홍콩, 일본 출신의 이민자 자녀나 유학생들이 많긴 했지만 비아시아계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서른 명쯤 되는 학생들은 모국어와 영어를 섞어 대화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중국어와 영어가 제일 많이 들렸다. 학생들은 협조적이었으나 적극적으로 보이지는 않았고, 순해 보였으나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김유나는 정말 훌륭한 선수예요.”

한 남학생이 시험지에 쓴 문장이었다. 나는 이 문장에서 유나, 를 연아, 로 바꾸어 주었다. 그 다음 주, 학생은 자기 시험지를 들고 와서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내게 따졌다. 

“유나킴을 유나킴으로 부르지도 못합니까?”

유나킴은 한국어로 김연아라고 했고, 연아킴을 유나킴이라 썼다 해서 네 점수를 깎은 것은 아니고 더군다나 넌 유나킴도 아닌 김유나라고 썼으니, 그녀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써 줬을 뿐이라고 그에게 구구절절 설명했다. 서부 출신이라 프랑스어를 구사했던 그는, 불어인지 영어인지 불분명한 언어로 혼잣말을 하더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 까탈스러운 남학생이 들어가자 한 시험지가 눈에 들어왔다. 

“안톤 오노가 멋있어요. 나는 그를 좋아해요.”

 나는 눈을 의심했다. 비꼬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사실, 이 시험지를 채점하기 전에 조교를 불러 확인했었다. 당시 내 수업을 도운 조교는 유타주 출신이었는데, 그곳은 2002년 오노와 김동성의 경기가 열렸던 솔트레이크 시티가 있는 곳이었다.

 “이 학생, 이거 진심이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이름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안톤 오노는 북미에서 인기남이었다. 김동성의 올림픽 금메달을 헐리우드 액션으로 앗아간 그는 한국에서 XX놈이다. “안톤 오노가 멋있어요.”라는 문장을 빨간 줄로 벅벅 그으려다가 “나는 그를 좋아해요.”를 “나는 그 선수를 좋아해요.”로 수정해 주었다. 

이는 비단 학생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밴쿠버 동계 올림픽은 내가 기억하는 한 필름이 뚝, 뚝 끊긴 경기였다. 한국 선수들이 열심히 뛰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 못했고, 한국 선수가 도대체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도 확인이 어려웠다. 올림픽 경기에서 한국 선수를 제대로 못 보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응원하는 선수와 그들이 응원하는 선수가 달랐다. 중계만 봐도 그랬다. 오랜 시간, 카메라에 정확하게 잡힌 한국 선수는 유나킴, 아니 김연아뿐이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그녀가 무척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다른 선수도 응원해 주고 싶었다.


카메라로 포착하는 대상 자체가 우리는 서로 달랐다. 캐나다 카메라는 캐나다 선수를, 한국 카메라는 한국 선수를 찍었다. 당연한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우리는 서로 편애중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어느 날이었다. 오전 10시 수업이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지각한 한 여학생이 앞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게 “안녕하세요?”라고 여유롭게 인사까지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적잖이 당황했고 살짝 말을 더듬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 지각했어요?”

그녀는 살짝 부은 눈으로 웃음을 짓고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늦잠 잤어요.”

나는 그녀의 당당함에 또 한 번 움찔했으나 내친 김에 인내심을 더 발휘해 그녀가 늦잠을 잔 이유를 들어보기로 했다. 이유는 바로 이러했다. 

 “동방신기 오빠들 영상을 보느라 늦게 잤어요.”

동방신기의 이름만 불러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보이는 이 학생에게 차마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사실 캐나다의 한 교실에서 불린 그 이름, 동.방.신.기.가 매.우.신.기.했다. 십여 년 전, 캐나다에는 한류가 조금씩 일기 시작했지만 그 또한 아는 이들만 아는 문화 정도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출석부 명단 앞쪽에 있는 그녀의 이름 옆에 ‘지각’ 체크를 했고, 그녀의 이름에 별표도 함께 쳤다. 그때부터 애쉴리를 향한 나의 편애중계가 슬슬 시작됐다. 동시에 캐나다 학생들의 솔직함에 길들여져 갔다. 


애쉴리 시나몬 Ashley Cinnamon

내가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된 본격적인 계기는 동방신기였으나 사실, 그 이전부터 그녀를 눈 여겨 보았다. 그녀의 주변에는 항상 아시아계 친구들이 있었다. 아시아 이민자들이 많은 곳에서는 흔히 있을 수 있기도 하겠지만 또 그것이 꼭 당연한 사실만은 아니었다. 


당시 캠퍼스 내에서 학생들을 보자면, 동양인은 동양인들끼리, 서양인은 서양인들끼리 어울려 다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영어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고, 그저 눈치로 그 분위기를 이해해갔다. 그래도 궁금해서 한국어가 비교적 유창한 교포 출신 한 여학생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성장배경이 비슷하니까 한국 교포 출신이나 동양 애들하고 자주 어울리는 것 같아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애쉴리는 달랐다. 


애쉴리의 가족(애쉴리 본인 제공)


그녀의 가족 중에 아시아인은 없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부터 한국에 관심이 생겼고, 한국 노래와 드라마를 접했다. 그러면서 한국어도 독학했는데 혼자 한국어를 끄적이는 것을 본 옆친구가,

 “넌 중국어도 할 줄 아니?”라고 물었단다. 그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노노노, 잇츠 코리안


애쉴리는 와인이 유명한 켈로나라는 작은 도시 출신으로, 한국, 중국, 일본이 그저 한 덩어리의 동일한 문화로 보는 이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이렇게 혼자 한국어를 익힌 뒤 대학에 와서 처음으로 정식으로 배웠다고 했다. 그녀는 조용했지만 소리 내어 잘 웃었고, 질문을 하면 대답하지 않거나 얼버무리는 일도 없었고, 정확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문장을 곧잘 써냈다. 애쉴리가 내 마음을 확실히 그녀 쪽으로 돌려버린 문장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나중에 한국어 교수가 될 거예요.


그 전까지만해도 애쉴리는 한국 음악을 좋아하는 서양인으로만 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전달한 순간, 나는 그녀를 시아준수의 팬으로만 기억할 수는 없었다.


교수자에게 ‘학생의 특별 관리’는 필요하다. 서른 명의 학생들은 저마다 학습 동기와 목표가 다르다. 외국어 학습 경험을 위해 (많은 품을 들이지 않고) 배울 만한 언어로 한국어를 선택한 학생이 있고, 학습 경험 그 이상으로 좀 더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보다 진지하게 배우고 싶어하는 학생도 있다. 애쉴리의 경우에는 후자에 속했다. 이런 학생에게는 보다 도전적인 과제가 필요하다.


마침 학교 측으로부터 온 공지가 있었다.

밴쿠버 한인 문인회가 주최하는 시 낭송 행사를 알리는 메일을 받았다. 학생을 몇 명 선별해 한국 시를 낭송하게 하는 행사였다. 물론 학생들 모두에게 이 공지를 전달했다. 아니나 다를까, 좀 더 진지하게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이 행사에 관심을 가졌다. 애쉴리는 망설이는 듯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이 행사에 참가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결국 애쉴리는 내 제안을 수락했고, 조지훈의 <민들레꽃>을 낭송하게 되었다. 낭송회 전에 학생들은 발음 연습을 해야 했다. 나는 그렇게 애쉴리를 자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고 애쉴리의 한국어 잠재 능력을 엿보았다. 


낭송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많은 한국인들 앞에서 한국어로 발표할 기회를 가진 경험은 애쉴리에게 크나큰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장담하건대, 외국어 학습에서 ‘무대 경험’은 꼭 필요하다. 누군가가 내 언어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반응하는 과정을 보며 “이 언어를 계속 배울 수밖에 없는 그 이유, 짜릿함”을 아주 오래 몸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좋은 경험’이라 포괄적으로 부른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어를 진지하게 배우려는 학생들에게 말하기 대회, 낭송회, 등의 공식적인 발표회에 참여하게 이끄는 작업은 나의 일이다.


한국어를 배우면서 자신의 목표를 확실히 설정을 하고 그에 맞춰 한 발자국씩 나아가려는 학생들을 보면 나는 그들의 발걸음에 함께 하고 싶어진다. 분명한 목표가 있는 학생들은 정말 그렇게 움직이게 된다. 선생의 마음도 그런 학생들에게로 향한다. 사랑은 그렇게 움직인다. 편애다.


그나저나 국문과 출신의 조 선생은 이 때 애쉴리와 함께 조지훈의 <민들레꽃>을 처음 읽었다. 이렇게 선생도 학생들과 함께 처음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가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아울러 다음에는 학생들의 자작시 낭송회를 열어보면 어떨까 기대해 보았다. 



민들레 꽃
                       조지훈
 
 까닭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 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들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2년 간의 계약을 끝으로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애쉴리는 UBC를 졸업했다. 

몇 년 뒤 애쉴리가 나에게 연락을 해 왔다. 

그녀가 한국에 온다는 소식과 함께.

(계속)


* 대문 사진: UBC 캠퍼스 중앙에 위치한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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