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뉴델리의 <세종학당>에서 만난 가야트리 이야기
세종학당은 한국어와 한국문화의 교육 및 보급을 위해 설립된 공공기관이다. 세종학당 누리집에 명시된 소개는 다음과 같다.
세종학당재단은 국외 한국어 교육과 한국문화 보급 사업을 총괄하기 위해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입니다.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알리고 한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이 한국에 대한 이해와 사랑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 「국어기본법」 제19조의 2에 근거하여 설립. 세종학당 누리집 주소(https://www.ksif.or.kr/com/cmm/EgovContentView.do?menuNo=10101210)
세종학당은 전 세계 60개국 중 180개소가 있다.
대만에도 가오슝에도 세종학당이 있었으며 당시 내가 거주하는 동안 학생들과 함께 참여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도 세종학당 주최로 이루어졌다. 한국어-한국문화의 교육과 보급이 세종학당의 주요 업무인데, 해외에 설립된 세종학당을 지원하는 일을 우선시한다. 지원업무로는 교사 교육이 있고, 학습 자료 제공이 있다.
나는 2013년경부터 국립국어원과 KBS World 공동으로 진행된 “한류 콘텐츠를 활용한 한국어교육 프로그램, <두근두근 한국어>”에서 한국어교육 부분을 맡고 있었다. <두근두근 한국어>는 세종학당에서 학습 자료로 제공되어 현지 교사들이 이 프로그램을 활용해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 업무를 하던 중, 국립국어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국립국어원은 <한국어 전문가 국외 파견 프로그램>을 추진하여 매년 해외에 일정 기간 동안 한국어 전문가를 파견하는데, 그 해에는 인도로 파견할 전문가를 찾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관계자의 추천으로 내가 선발되는데 갈 수 있겠느냐 물었다. 대답은 당연히 예스, 였으며 그렇게 나는 5박 6일의 일정으로 인도 뉴델리 한국문화원에 가서 한국어 교수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쓰기, 문법, 발음 교수법 강의를 맡게 되었다.
뉴델리 한국문화원
넓고 깔끔한 내부로 들어가자 한 여학생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이 일상적인 인사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발음이 자연스러웠고, 고개를 숙이며 내게 인사를 건넸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하며 고개를 숙이는 외국인은 많지 않다. 한국어를 오래 배운 이들에게도 목례를 갖춘 인사법은, “간장 공장 공장장은…”의 발음만큼이나 익숙해지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다.
가야트리(Gayatri Sanabam)
세종학당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는 학생이었다. 세종학당에서 초급부터 한국어를 차근차근 배워 인턴으로까지 고용이 됐으니 그녀의 한국어 실력과 성실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싹싹한 말투로 그녀가 다가오자 나를 감쌌던 불안감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가야트리는 그랬다. 낯선 환경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의 긴장감을 무장해제 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세종학당에서 가야트리는 우리의 일정 진행을 도왔다. 우리라고 함은 한국에서 갓 도착한 나와 국어원 연구관님을 말하는데, 우리 일정은 빡빡하게 잡혀 있었고 우리가 오가는 모든 곳의 실내는 미로였고, 밖은 뭐랄까 사방이 막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인도의 도로는 복잡했다. 사람, 인력거, 차, 소, 모두가 손에 손잡고 바퀴와 바퀴를 맞대고 이동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 사이로 막 가는 이는 비 사이로 막가는 이보다 더 대단해 보였다. 가야트리는 인도의 복잡한 구석 구석을 잘 인도引導해 주었다.
가야트리는 한국어를 잘했다.
세종학당에서 한국어를 정식으로 배웠고, 그 이전에는 한국 드라마와 노래를 통해 접했다고 했다. 90년대 후반 그녀의 고향 마니푸리에서 아리랑 채널을 볼 수 있었는데, 아리랑에서 한국 방송을 봤고 특히 “Let’s Speak Korean”이라는 매일 15분 가량 방송되는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으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단다. 독학과 기관에서의 학습을 오가며 짧은 시간 안에 한국어를 고급 수준으로 구사하는 그녀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나 사실, 나는 이전부터 인도인들의 뛰어난 언어 습득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일단 한국어를 잘하는 인도인으로 말하자면 대중적으로 알려진 럭키가 있다.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에서는 흥도 많고 돈도 많은 그의 인도 친구들과 함께 한국 곳곳을 누비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퀴즈 프로그램인 <대한외국인>에서는 한국 거주 24년차답게 유창한 한국어 실력(그에게는 한국어 실력이 뛰어나다고 말하는 게 오히려 실례처럼 느껴진다. 그가 구사하는 언어를 듣자면 그는 그냥 한국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과 한국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비해 취약한 반전 퀴즈 실력을 보이며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나 또한 인도인들과의 경험이 있다.
2012년에서 2013년까지 국내 한 대학에서 외국인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 절반은 인도인이었고, 절반은 필리핀인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영어에 능통했다. 한국어 초급이었는데 학습 속도가 빨랐고, 발음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대학원생이니 기본 지적 능력을 갖춘 이들이라 그러하겠거니 싶다가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대학 교수, 회사 대표, 의사 등 지적 수준의 최고점을 찍은 이들 중에서도 한국어가 안 배워지는 이들도 수없이 보아왔으니 이게 괜한 소리는 아니다.
인도인들은 외국어를 구사할 때 자신감이 있었다.
그들이 구사하는 영어도 발음이나 문장 구조 측면에서 정확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문장을 머릿속에서 짜깁기 하느라 괜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할 말은 바로 해버렸다. 이런 성향은 외국어 학습에서 큰 이점으로 작용한다. 생각이 많고 지식이 많은 이들은 외국어를 빨리 배우기 어렵다. 생각을 많이 안 하고 그 상황에서 제가 아는 말을 다 하는 이들이 단언컨대, 외국어 습득 및 학습 속도가 빠르다. 이런 면에서 인도인들은 다른 학습자들에 비해 외국어 학습이 빠르지 않았을까 싶었다.
세종학당에서 만난 인도인들도 그랬다.
한국어과 교수로 재직 중인 인도 교수들 모두 한국어가 유창함은 물론이고 초급 수준의 학생들 또한 망설이지 않고 내게 말을 걸었다. 수업 참관을 위해 단계별로 교실을 돌 때 학생들은 머뭇거림 없이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겼고, 정말 ‘제가 알고 있는 말’을 하나라도 더 건네려고 했다.
2014년 당시 세종학당 재학생 중 90% 이상이 20대였다.
나이 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의 한국어 학습 목적은 ‘취업’이었다. 세계에서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인도는 내수시장이 커 세계 각국의 기업들이 파견을 나와 있다. 한국의 경우, 삼성, 현대, 엘지, 등의 대기업이 오래 전부터 인도에서 활약하고 있고 최근 포스코도 합류해 인도 내에서의 한국 기업의 입지는 견고하다. 이는 인도에서 만난 한국어 학습자들의 학습 목적은 첫째도 삼성 취업, 둘째도 삼성 취업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었다.
인도에서 돌아온 후 얼마 지나 한국에서 가야트리를 만났다.
대학교 마지막 학기를 세종학당 인턴 생활과 함께 보낸 후 한국에 온 것이었다. 그녀는 티브이에서만 본 한국을 직접 보고 한국에서 생활도 해 보고 싶은 마음에 큰 결심을 했다고 했다. 당시에는 동서대에서 일 년 간 한국어교육 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었고, 그 이후 그녀는 본격적으로 한국어에 전문성을 갖추고자 경북대에서 국어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한국어에 대한 작은 호기심이 그녀를 한국어 전문가로 만들어 준 것이다.
한국 기업에의 취업을 목표로 삼았지만 그녀는 인도로 돌아가 미국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녀의 업무는 한국 마켓 리서치이다. 한국어와 영어에 능통한 그녀에게는 제격이었다. 여전히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는 점 또한 그러했다.
가야트리는 SNS에 한국 관련 기사나 사진을 포스팅하는데 글은 꼭 한국어로 쓴다. 부산 깡통시장 거인 통닭, 손수 만 김밥,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마지막회에 특별 출연한 박보검,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대사 인용, 가수 다비치의 신곡 소식, 그리운 한국 친구까지. 포스팅 된 사진과 글을 보다가 너무나 한국적인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그녀가 한국에 있다고 착각을 하곤 했다.
인도의 작은 마을에 살던 한 소녀는 방송을 통해 한국을 알아갔다. 비단 가야트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애쉴리도 캐나다의 시골 마을에서 한국 드라마와 동방신기를 보며 한국어를 써갔다. 대만 남부의 아이들은 뽀로로와 런닝맨, 인피니트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각지의 아이들이 한국과 한국인을 보며 자란다.
그들은 영상 속에 펼쳐진 스토리와 리듬의 향연에 빠져들어 한국인들과 자기만의 방식으로 대화해 간다. 이처럼 한국 문화가 세계의 아이들을 키워가고 있다. 나는 여기서 한국 문화의 힘을 보았다.
그렇다면 한국 문화가 아이들의 성장에 적극 관여하고 개입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아이들의 성장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우리 문화가 어떻게 한 인간을 커가게 했고, 또 변화시켰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때라고 본다. 세종학당 설립 및 해외 한국어-한국문화 지원 사업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며, 그 기틀을 마련하게 된 계기는 한국, 한국어, 한국문화에 스스로 다가선 한 사람의 움직임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곳에 학생들의 이야기를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학생의 마음에 들어가 그들의 변화를 본다. 이제는 이들의 성장에 주목해야 할 때다. 이들이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은 분명 그 이전과는 다르다.
국립국어원, KBS, 세종학당 등 한국어의 세계화에 힘쓰는 기관에 스치듯 아주 잠시 합류했지만, 그때마다 느끼는 바는 이렇다. 이들이 계획하는 거대한 업무에는 ‘사업’ 이전에 ‘개인’이 키워드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한류의 붐을 타 한국어교육이 양적 팽창을 이룬 시점을 2000년대 초반이라고 보면 이십 년이 된 지금, 한국어로 인해 변화된 한 인간의 성장을 조명해 볼 필요는 분명 있다. 그들을 아는 일이 곧 우리를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야트리와의 만남은 내게 소중했다.
현지에서 오직 자신만의 선택으로 한국어에 관심을 갖고 그 관심을 지속적으로 이어가 자기가 할 수 있는 목표치에 도달해 가는 학습자,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목표가 견고한 이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보람되다. 무엇보다 잘 자란 한 사람의 모습은 눈물 겹도록 아름답다. 그리하여 나는 잘 성장한 누군가를 계속 찾고 있나 보다.
* 관련 사이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india.korean-culture.org/ko
https://www.youtube.com/watch?v=eHPBrx589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