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영미 Aug 19. 2021

[대만]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학원생, 서이정

- 한국어와 함께 성장한 서이정

악어오리 구지구지'가 알려준 부모-자녀 이야기

 오리가 “구지구지” 소리를 낸다면?

 뭐 별 거 있나? ‘악어오리 구지구지’라 부르면 되지.

 오리 엄마의 말을 똑같이 따라 하지 않는다고, 

엄마를 닮지 않았다고 오리가 될 수 없는 건 아니지, 꽥꽥.



이미이 출처: 알라딘

  몇 해 전, 대만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때였다. 부전공 필수 과목 <중급한국어>를 듣는 학생들과 <악어오리 구지구지>라는 동화책을 함께 읽었다. 이는 대만의 유명 동화작가 천즈위엔의 대표작품이다. 

<악어오리 구지구지>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오리인 줄 알고 오리 가족과 지냈던 악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은 뒤 자신을 ‘악어오리 구지구지’라 명명하며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이야기로, 작가가 미국 여행 중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던 한국계 미국인 친구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작가도 언급했듯이 이 글의 핵심은 ‘정체성’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타인과 다르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 “그로 인한 갈등 혹은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는가?”에 대해 학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학생들은 이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은 감상문을 썼다. 


(1) 이 세상에 다른 종류의 사람은 많이 있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한국 살 때, 쇼핑을 하고 식당에서 친구와 중국어로 말할 때 식당의 이모들은 귀엣말을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친절하지만,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한국에 살기가 행복했다. 한국 사람들은 저에게 포용했다(나를 포용해 주었다). 나는 외국인이지만 (그들은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2) 사실 나는 누구인지 자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어느 나라의 사람인지 또 생각한다. 중국과 대만은 다른 나라이다. 우리의 언어가 같지만 문화와 생활이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많은 역사와 정치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마음이 아주 힘들다. 이 책을 읽고 한 점을 알았다. 나는 구지구지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모를지라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나는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한 학생만이 유독 ‘엄마와 자녀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자식은 부모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선물이라고 했고, ‘선생님처럼’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 감상을 쓴 것이었다. 나는 이 학생의 글이 참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이야기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계속 잡고 싶은 따뜻하고 두툼한 엄마의 손. 엄마와 함께 본 드라마 <천국의 계단>이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는 내가 한국어를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된 거 같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어떤 것을 대해서도 항상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엄마가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인육의 ‘사랑의 물리학’을 배운 뒤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주제로 글쓰기를 했을 때에도 그녀는 엄마 이야기를 썼다. 그녀의 글은 항상 엄마를 향해 있었다. 다음의 글은 그녀가 한국어를 어떻게 마음에 품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저에게는 한국어는 단지 언어만이 아닙니다. 한국어 하면 떠오르는 기억, 어렸을 때 가족들과 함께 만든 행복한 추억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엄마는 암에 걸려 일찍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병원을 자주 다녀야 했던 엄마하고 같이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 내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되었습니다. 소파에 앉아 엄마에게 기대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드라마 장면에 따라 울고 웃으며, 지금 생각해 봐도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엄마의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항상 따듯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공부 열심히 해서 엄마 아빠 대신 더 넓은 세상 많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항상 최선을 다하기로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저는 엄마가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딸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한 나, 엄마의 손을 놓으며 이 험한 세상에 혼자 잘 버틸 수 있을지 매우 두려웠습니다. 앞으로도 엄마, 아빠, 남동생, 그리고 저를 위해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언어는 추억이 되기도 한단다.

모국어로 속삭인 말들이 아닌 낯선 외국어가 누군가에게는 추억의 한 장면으로 남기도 한단다.

나는 그 사실을 이정 씨를 통해 알게 되었다.

서이정(徐莉婷)

그녀는 대만 남부의 도시에서 자랐고, 현재 아빠와 남동생과 함께 산다. 


서이정 씨와 아버지, 남동생과 함께


 이정 씨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전공은 외국어교육학이었고, 한국어를 부전공으로 했다. 재학 중이던 학교에는 한국어 전공과정이 없었기에 한국어 과정을 부전공으로 삼은 것은 그녀로서는 최선이었다. 그녀는 당시 한국에 간 적이 없었지만 한국어 구사가 아주 자연스러웠고, 나와 한국어로 대화를 하는 일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발음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엄마와 드라마를 보며 한국어 대사를 따라한 덕분이라고도 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하기 대회 출전을 권유했다. 나는 그녀를 지도했고, 우리는 열심히 했지만 많은 일이 그러하듯 열심히 했다고 이상적인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크게 낙담하지 않았고 그저 하던 대로 열심히 한국어를 배워갔다. 


 그렇게 우리 각자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 2019년 여름, 나는 대만에서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해 가을, 이정 씨도 한국에 왔다. 교환학생으로 선발돼 한 학기 동안 한국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대만 대학교로 다시 돌아가 2020년 가을에는 가오슝 한국어말하기 대회에 나가 대상을 받게 되었는데, 앞서 보인 글은 그녀가 말하기대회에서 발표했던 글의 일부이기도 하다.


가오슝에서, 서이정


 얼마 후 그녀는 내게 연락을 해 왔다.

한국 대학원에 가고 싶어요.

그녀는 전문적으로 한국학에 대한 지식을 쌓고 싶다며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 과정에 입학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한국학을 진흥하기 위하여 설립된 재단으로 한국학 관련 자료의 수집, 연구, 번역, 출판 등을 하는 연구 사업과 한국학대학원을 통한 교육 사업 등을 하고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aks.ac.kr) 참고). 이정 씨는 한국학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이었고, 내게 추천서 작성을 부탁했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위해 추천서를 썼다.



 대만 생활을 하며 느낀 건데, 대만과 한국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같은 아시아권이라 서로 비슷한 점이 많을 것도 같지만 한-대만 문화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이 이야기는 다른 매거진 <살아보니, 대만>에서 익히 이야기한 부분이기도 하다. 


 대만 학생들이 한국어를 전공하려고 해도 부모님의 반대로 그 뜻을 접는 경우도 허다한데, 이는 부모님 세대들이 한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국어를 전공해 성공한 모델을 주변에서 찾기 어려워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정 씨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한국 문화를 접하며 커왔고, 부모님께서는, 그녀가 한국 문화에 깊이 관심을 가지며 자신의 미래를 한국과 관련된 일로 계획했을 때에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셨다. 성장과정에서 이러한 부모님들의 전폭적인 지원은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큰 차이를 낳는다고 본다.


서이정 씨가 한국어로 제작한 포스터


 이정 씨가 워낙 착하고 성실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정 씨의 부모님이 참 훌륭한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의 미래를 함부로 결정한다. 

“너는 의대에 가야 돼.”

“너는 이과가 아니면 밥 벌어먹고 살기 힘들어” 등등. 

그뿐인가? 자녀들을 함부로 평가한다. 

“너 같은 애가 뭐 그런 걸 한다고?”, “머리도 나쁜 애가 욕심만 많아가지고.” 등등. 

훈육이란 이름의 막말이 자녀들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자녀의 생김새나 언어, 관심사를 제멋대로 지적하며 자녀에게 그들이 원치 않는 이름을 붙여준다. 나는 그것이 욕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구지구지’라고 불러주는 부모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정 씨 부모님은 그녀의 관심사와 하고자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고 함께 관심을 가져 주셨다. 어린 이정이 한국 사람들을 신기하게 보고 한국 드라마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그녀의 엄마는 그녀와 함께 드라마를 보았고 그것은 훗날 이정 씨에게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이정 씨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정 씨 아버지와 남동생을 2019년 가오슝 한국문화의 날 행사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말하기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동생이 K-pop 공연을 하러 왔는데 이정 씨와 아버지가 그를 응원하기 위해 참석한 것이었다. 


 나는 대만에서 말하기 대회 지도를 4년간 했는데, 그때마다 대회에 참석하는 자녀를 보기 위해 참석한 부모님은 한 분도 안 계셨다. 딱히 싫어했다기보다 자녀가 하는 일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둔 분도 있고, 자녀의 관심사에 굳이 함께 할 생각이 없었던 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정 씨 아버지는 달랐다. 당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아들이 한국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공연을 한다고 하자 기꺼이 아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그 자리에 참석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행사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시간을 함께 하시며 다른 지원자들의 공연에도 힘껏 박수를 보내 주셨다. 


 이정 씨의 옆자리에 앉았던 나는,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부모의 지지와 사랑이 아이들의 성장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나는 이정 씨네 가족을 보며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자녀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해 주는 일이야말로 부모가 해야 할 일이 아닌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대로 괜찮은 인간인가?’처럼 자녀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일은 남들보다 키가 작아서, 말이 어눌해서, 갑자기 해외의 국제학교에 들어가서가 아니다. 자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부모의 ‘비겁한 평가’  더 큰 문제였다. 내가 ‘비겁하다’라는 말을 쓴 이유는, 현재 자녀의 모습에는 부모 자신들의 책임과 의무가 투영돼 있는데 그들은 그것을 제쳐두고 제 눈에 비친 자녀의 부정적인 면모를 집중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모의 비겁한 평가를 꾸준히 받고 자란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 상처를 지우지 못하게 된다. 


이정 씨는 대학원 합격이라는 바라던 소식을 듣고 현재 한국에 와 있다.

9월 새 학기 준비와 ‘슬기로운 격리 생활’을 함께 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다음은 서이정 씨가 남기고자 하는 말이다.


저는 운이 매우 좋아서 한국어를 공부하며 성장하는 과정이 순조로운 편이었다고 생각해요.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왔었을 때도 저에게 많이 도와준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 만나게 돼서 제가 정말 축복을 받음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거든요. 예전에는 자신감이 낮았지만 한국어 공부를 하면서 한국인 선생님과 친구들 칭찬을 해주니 자신감도 많이 키웠고요. 앞으로도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제가 사랑하는 가족과 선생님 실망하게 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직 슬기로운 격리 생활을 지내고 있지만 미래 한국에서 자유로운 생활도 기대하며 알차게 보내고 싶고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추천서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서이정 씨가 한국-대만 교류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한국에 대한 무한 사랑과 뛰어난 한국어 실력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녀에게 한국어는 의사소통이나 정보 전달의 수단만이 아니었다. 한국어는 그녀의 지워지지 않는 그녀의 마음 속 과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현재, 미래를 연결해주는 끈이자, 땅에서부터 닿지 않을 듯한 하늘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엄마. 


 마음이 움직여서, 끌려서, 저도 모르게 그 일에 몰입하게 됐다면 나는 그녀에게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거라 칭찬해 주고 싶다. 그것이 한국어라면, 나는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그가 내 학생으로 계속 남고 싶다면 더 많이 가르쳐 주고 싶다. 그가 나를 엄마처럼 생각한다면 기꺼이 엄마가 되어 주고 싶다. “정서야, 보고 싶다”라는 드라마 속 대사를 함께 나누던, 어린 그녀의 머리를 땋아주던 엄마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 대문사진: 가오슝시립도서관 도서(본인 촬영)

** 기타 사진은 서이정 씨 본인이 제공하였고, 본 내용 또한 서이정 씨가 확인한 내용임을 밝힙니다.


*** 관련 포스팅

<살아보니, 대만> 매거진

https://brunch.co.kr/magazine/taiwan-cho

<사랑의 물리학> 관련 활동 포스팅

https://brunch.co.kr/@youngmicholaf5/84


<악어오리, 구지구지>로 활동한 수업 내용은 조영미(2020)을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전 12화 [중국] 거상을 꿈꾸는 기업인 양쥐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