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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미 Jan 02. 2017

선생님, 허리 사이즈가 몇이에요?

- 1999년 방글라데시 나디미 씨를 떠올리며,

한 남학생이 내게 물었다. 체격이 왜소했고, 눈이 크고 맑았고, 스무 살을 갓 넘은 듯했다. 나를 자신의 성적 호기심의 대상쯤으로 여길 아이 같지는 않았으나, 그의 질문은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야 할 것 같아, 웃으면서 대답했다.  

“비밀이에요.”  


방글라데시 출신의 이 학생은, 수업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말수가 적었는데, 그것이 성격 때문인지, 한국어 능력 때문인지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때였다. 그 학생은 다음 시간에 또 나를 찾아와 같은 질문을 했다.  

“선생님, 허리 사이즈 몇이에요?”  

여전히 불쾌했지만, 답변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고(사실은 얼른 뭐라도 답을 해줘야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리하여 성실히, 그러나 다소 퉁명스럽게 답했다.  

“이십오예요.”  

물론 그것은 오답이었다. 그에게 정답을 알려줄 의무도 의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주,  

그 학생은 검은 비닐 봉지를 내게 내밀었다. 내용물에 비해 터무니 없이 큰 비닐에서 보드라운 무언가를 꺼내 집었다.  


 

바지였다.

“선생님, 나 공장, 바지, 나, 만든 거.”    


바지 공장에서 일하는 그 학생은 나에게 자기가 직접 만든 바지를 주려고, 끊임없이 내겐 너무 불쾌하기만 했던 질문을 했던 것이다. 한국말이 서툰 그 학생은 일요일 아침마다 그 문장을 몇 번이고 연습한 뒤, 용기 내어 ‘한국어 선생님’에게 물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내 생각이 너무도 짧았다. 남의 속마음보다 남들에게 보이는 내 외모에 집중하던 때이기도 했다.    

그 바지는 너무 작아 입을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솔직하게 이십팔이라고 알려주는 건데,   

라며 늦은 후회도 해 보았다.     



건국대학교 일요대학



90년대 들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서로 간의 만남의 장을 마련해 주고,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울 수 있게 해 주자는 취지에서 설립한 일요대학은 건국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설립한 프로그램이었다.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입소문을 타 해가 갈수록 학생들이 늘었다. 그래도 건국대학교에서는 변함없이 그 학생들에게 푸짐한 점심을 대접해 주고, 소속감을 느끼게끔 일요대학생증도 만들어 주었고, 학생들은 자랑스럽게 학생증을 목에 걸고 다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도 대학생이에요.”  


어쩌면 일요대학은 나를 '조 선생'으로 만들어 준 첫 교실이었을 것이다.
정식적인 교실 환경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으니 말이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신문기사를 검색하다가 일요대학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동기생과 함께 일요대학의 한국어 교사로 지원했다. 경험이 미천한 때라 자격조건이 여러모로 부족했지만, 당시 사회교육원장이었던 최창모 교수님의 배려로 교사가 될 수 있었다. 모든 교사들은 봉사로 참여했다. 정식 급여는 없었고, 한 학기에 한 번 꼴로 건국대학교가 자랑하는 소시지 선물세트를 한 상자씩 받았다. 나는 여전히 그 소시지의 깊은 맛을 잊을 수 없다.    



나에게 바지를 준 학생의 이름은 ‘나딤’이다. 사장님은 그를 “나디미(‘나딤이’일 것이다)”라고 부른단다. 그러니 나딤 씨는 나도 그를 ‘나디미’라 부르라고 해서 나는 그를 ‘나디미 씨’라고 불렀는데, 그는 왜 자기 이름에 ‘씨’를 붙이느냐고, 빼면 안 되느냐고 했고, 나는 안 된다고 했다.   

나디미 씨는 시간이 갈수록 곧잘 한국어를 했다. ‘칫솔’이란 단어를 배우던 어느 날에는,   

“선생님, 나 그거 알아요. 지하철에서 세 개에 천 원, 그거예요.”  

라며 자신 있게 대답하기도 했다.  


보통의 한국 사람이라면, 칫솔을 “지하철에서 세 개에 천 원하는 거”라 칭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디미 씨를 비롯한 학생들의 언어는 우리가 규정하는 틀에서 거의 벗어나 있었으며, 모두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다. 그리하여 초짜 선생은, 이론상 정해진 규칙을 따라 수업 자료를 만드는 방법과 동시에, 학습자들의 요구나 상황에 맞춰 교재나 수업 자료를 만드는 일도 시작했다.


나디미 씨를 비롯한 그 시절의 학생들은 오히려 나를 가르친 셈이었다.



돌이켜 보면, 처음 맡은 한국어 교실이 특정 대학의 어학원 같은 곳이 아닌,   

일요대학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학생들은 왜 그토록 절실하게  

‘사장님의 언어’인 한국어를 배워야 했는지,  

그리고  

‘사장님의 뜻’을 헤아려가며 배운 한국어가  

어쩌면 저리도 자연스러울 수 있었는지  

그 과정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현재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사장님의 언어’로 버겁게 소통해야 할 때가 있고, 때로는 ‘사장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해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그들의 입장과 내 모습이 겹쳐지며,

나는 그들의 선생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동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디미 씨가 만들어준 바지는 결국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다. 나의 무성의한 대답이 초래한 결과였고, 학생을 대하는 방법에 서툴기만 했던 초짜 선생의 실수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많은 실수를 했고, 많은 오해도 했고, 그로 인해 일을 그르치기도 했으나, 다행히 조 선생의 한국어 교실은 현재도 운영 중이다.   



 

안타깝게도 일요대학은 문을 닫았다.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차차 알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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