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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미 Dec 30. 2016

조 선생은 왜 조 선생이 되었나?


 대학교 3학년이 되던 해, 교환학생 자격으로 미국에 가게 되었다. 무척 들떠 있었고 기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기쁨이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사라졌던 사실도 기억한다.


기모노를 입은 여자 사진,
그리고 우리, 한국인


우리(총 3명)가 학교에 도착하니 우리가 살게 될 기숙사 정문 앞에 우리를 환영한다는 짧은 메시지와 함께 기모노를 입은 여자 사진을 붙여 놓은 것이 아닌가. 게다가 만나는 내 또래의 학생들은 반갑다고 인사를 해주며, 니네 나라에서는 중국어를 쓰느냐, 일본어를 쓰느냐, 북한에 가 봤느냐, 심지어 집에 냉장고가 있느냐는 질문까지 했다. 말문이 막혔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멍하게 그들을 보다가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눈이 엄청 많이 내리던 1995년 1월의 어느 날이었다.




한국인이 없었다. 그리고 한국어도 없었다.


그곳 학생들은 한국인을 만난 적도, 한국어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나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과 일상을 나누는 일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내 영어 실력은 미국에 도착하면서부터 “형편없음” 도장을 받았고, 이내 주눅이 들어, 말 한 마디도 못하고, 수업 시간에 테이프를 넣는 낡은 녹음기를 달그닥거리며 수업 내용을 녹음하는 게 다였다. 기숙사에 돌아와서 강의 내용을 다시 들으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는데, ‘낡은 녹음기’ 탓만 하기에는 내 영어 실력은 정말 나날이 별 볼일 없어지고 있었다.


한국에서, 영어학원에서, 일 년 반 동안, 매일같이, 방학에도, 새벽에 나가, 영어를 해서, 고급단계까지 가고, 교환학생도 됐는데


영어 실력은 여전히 형편없었다.

나는 아주 작아졌다.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고, 방에서 매일 울었고, 밖에 나가 담배를 피웠다.


학교 측에서는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내 태도를 알아차렸는지, 아니면 미리 계획했었는지 그 동네의 한 가족을 소개해 주었다. 부모님과 세 남매의 아주 단란한 가족이었다.


가족들을 만나는 날, 나는 나와 닮은 한 아이를 보았다. 백인 부부가 남매를 낳았고, 막내 딸은 한국에서 입양을 했다고 했는데, 아이에게 한국에 대해 알려 주기 위해 한국에서 온 학생이 있다고 해서 나를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한국을 아는 가족이 있었다.


나를 집으로 데려간 부모님은 막내 딸이 돌이 채 되지 않아 미국에 왔을 때 들고 온 색동 고무신과 철제로 된 분유통을 보여 주며, 보통 한국 아기들도 이런 분유를 먹느냐, 이런 고무신을 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원래 김 씨라서 영어 이름을 킴벌리로 지었는데 한국에는 정말 김 씨가 있느냐고도 물었다. 아주 쉬운 질문이었고, 나는 금세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영어가 술술 나왔다.


이후로도 종종 그 집에가서 밥도 얻어 먹고, 킴벌리에게 한국어도 가르쳐 주고, 같이 쌀보리 같은 놀이도 하고, 그 아이의 긴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댕기 머리나 디스코 머리도 땋아주었다. 나의 별 볼 일 없는 영어를,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마음이 편했다. 그들은 진정으로 내 말을 듣고 싶어했고, 이해하고 싶어했다.  



이 모든 것은 은혜 덕분이었다.


김은혜

한국에서 온 김은혜, 미국의 킴벌리.

은혜는 그렇게 나의 첫 한국어 학생이 되었다.



내가 한국어 교사가 된 계기는 미국에서 만난 입양아들과 무관하지 않았다.

 

은혜를 만나고 얼마가 지나서였다. 수십 명의 미국 아주머니들이 가슴 한 쪽에 이름표를 붙이고 학교 강당에 들어섰다. 동창회 모임이었다. 그 중 한 아주머니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한국에서 온 학생, 맞지?”

내가 놀란 눈으로 맞다 고하자 그는 자기소개를 했다. 현재 사회복지사이며,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을 위한 일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름방학 때 자기와 함께 일해 보자고 제안했다. 미국에 온 지 몇 달 안 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못 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캠프 무지개 (Camp Mujigae)


미국 알바니(Albany)에서 매년 여름 열리는 한국 입양아들을 위한 문화 캠프가 있었다. 약 일주일간 뉴욕 근교에 거주하는 입양아들과 입양 가족을 위한 캠프였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으나, 아마 아이의 연령대별로 프로그램 참가 시간이 달랐을 것이다. 어떤 날은 아이들의 부모님과 함께, 또 어떤 날은 아이들하고만 활동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별로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나는 아이들과 함께 만두 빚기, 김밥 만들기, 게임하기 등등에 참여했다. 뭘 해도 아이들은 나보다 잘했다. 내 나이 또래의 성인이 된 입양인은 아이들을 잘 다루었고, 나는 옆에서 거들 뿐이었다.그러나 내가 캠프에 온 그 누구보다 잘하는 일이 있었다.


한국어 수업


캠프에는 한국어를 배우는 시간이 있었고, 나는 그 시간을 맡았는데, 국문과 출신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뭘 가르쳤는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오이, 가지, 코끼리, 뭐 이런 받침이 없는 간단한 단어를 가르쳤을 뿐이었을 텐데, 그 아이들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었다는 사실만으로 내 마음 속엔 뭉클한 무언가가 잡혔다. 태어나자마자 미국으로 건너 온 아이, 날 더러 화장품은 뭘 쓰느냐고 묻는 아이, 자기가 크면 날 닮아 있을 것 같다는 아이, 친구들이 자기더러 포카혼타스라고 부른다는 아이, 한국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말이다. 그 때 만난 아이들은 아주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었다. 


Making melodies in my heart at Mujigae

내 마음 속 화음을 만들어요, 여기 무지개에서.


캠프 무지개에서 하루에도 스무 번씩 더 불렀던 노래였다. 이십 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그러면서 무지개에서 만난 아이들이 내게 던졌던 몇몇의 질문들이 맴돈다. 그들은 지금 정말 나와 닮은 모습으로 어딘가에 살고 있을까? 나와 열 살 정도 터울이 났으니 그 아이들도 이제 각자 자기 분야에서 제 몫을 하는 성인으로 자랐을 것이다. 


그 캠프 참가 이후, 미국 미네소타에서 발행되는 한국 계간지 Korean Quarterly를 한국에서 구독 신청을 해서 받아 보았다. 


어느 날, 그 신문에서 공고가 났다.


미네소타 주 콘코디아 대학교 내 콘코디아 언어마을 프로그램에서 한국어마을을 시작합니다. 스태프 자격으로 일할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이쪽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이 공고를 보고 바로 “이쪽”으로 연락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10년 동안 한국어마을이라는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귀한 인연들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미국 교환학생 -- 캠프 무지개 참가 -- 한국 계간지 구독 신청 -- 한국어 마을 참가


어쩌면 무지개는

나를 지금까지 조 선생으로 살게 해 준 다리가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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