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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미 Feb 04. 2022

인도네시아에서 온 편지

- 아그네스의 미소

금요일 오후 수업이었다. 

몇 명은 졸린 얼굴로, 몇 명은 만사가 귀찮다는 얼굴로, 그나마 몇 명은 수업 후 일정을 떠올리며 들뜬 표정을 짓기도 했다. 


학생들의 국적은 다양했다. 

중국, 베트남, 일본, 러시아, 인도네시아. 서른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있었고, 중국과 베트남 학생이 다수를 이룬 수업이었다. 단 한 명이었던 인도네시아 학생은 한국어 실력이 좋은 편임에도 말수가 적었고, 적극적으로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그룹에서든 소수가 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수강생들은 주로 신입생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학 생활과 해외 생활을 모두 처음 경험하는 학생들이 많다. 자국에서 한국어를 배운 학생들이 그러하다. 만 스무 살 전후의 학생들은 집을 떠나 홀로 자신을 챙기며 생활해야 한다. 많은 학생들이 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쉽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


어느 날, 인도네시아 학생이 수업에 오지 않았다. 

유난히 말수가 적은 학생이라 신경이 쓰였다. 그 다음 주에 그녀가 출석했다. 나는 출결 확인을 하면서 지난 주 그녀가 결석한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녀는 알고 있다고 했고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좀 더 밝은 모습으로 학교 생활을 했으면 진심으로 바랐다. 그녀에게도 밝은 에너지를 줄 친구를 만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래 전 한 인도네시아 학생의 미소로 학교 생활을 버틴 적이 있었고, 그 때의 기운을 그녀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삼십 대가 되면 사회적으로 안정을 찾고 무슨 일을 맡든 척척 잘해내리라 상상했다. 

그러나 나의 삼십 대는 그렇지 않았다. 변화가 심했던 이십 대와 달리 삼십 대에는 그 동안 쌓아온 경력, 인맥, 인성 등을 잘 관리해야 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고, 여기저기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학위를 받고 성취를 이룬 시기도 삼십 대였다. 나는 당시 오랜 시간 강사 생활 끝에 전문연구원이라는 직함을 얻었고 개인 연구실도 받았다. 예전에 쓰던 강사실 바로 옆이 당시 내 연구실이 었다. 방 한 칸을 이동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십 년이 넘었다. 물리적 공간 이동은 한 칸이었으나 다른 강사들과의 심리적인 거리는 훨씬 더 멀어졌다. 그들은 웃으며 인사했지만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내가 위로 한 단계 올라가면 곁에 있는 사람은 두세 걸음 멀어지는 이치를 그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성취가 성취로 느껴지지 않았고 상사의 갖은 압박과 낯선 행정업무는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가장 난감했던 일은 강의평가점수가 낮은 강사를 불러 상담을 하거나 그들이 그런 점수를 받게 된 연유를 분석해서 보고서로 작성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 날도 아마 그런 날이었을 것이다. 내키지 않은 업무로 인상을 쓰던 그런 날, 아래 한글 양식에 맞춰 조작된 언어로 문장을 쓰다가 시간에 맞춰 책을 들고 교실로 바삐 갔을 그런 날.


선생님, 안녕하세요?


내가 들어서자마자 한 학생이 나를 향해 환한 미소로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나를 아주 오랫동안 바라봐 주었다. 마치 오래 전 나를 만났던 친구처럼, 그 동안 나를 그리워했을 그 누군가처럼, 그녀는 나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학교에서 나를 마주치는 사람들이 저 멀찍이 서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며 스쳐가던 때였다. 나를 그렇게 오랫동안 바라보며 미소 짓는 이들이 있었을까. 나도 잠시 문 앞에 서서 그녀를 보았다. 네, 안녕하세요, 라고 했겠지. 그리고 조금은 웃었겠지, 아니 웃지 않았을 수도.  


그날 이후 왜 그렇게 계속 웃느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수업 시간 내내 미소 짓고 있었다. 옆 친구와 토론을 할 때에는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아그네스

그녀의 이름이다.

신의 이름 같기도, 천사의 이름 같기도 한 아그네스.

그녀는 인도네시아에서 왔고, 운동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한국어를 썩 잘해 나와 무리 없이 대화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와 말이 잘 통했다. 그 당시에도 교실에는 중국 학생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우리 반에 인도네시아 학생은 그녀뿐이었다. 그녀가 소외감을 느낀다고 말해도 누구도 반발할 사람은 없었지만 그녀에게서는 그러한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와도 잘 어울렸다. 아침 9시 수업은 힘들다며 눈을 못 뜨는 중국 남학생(심지어 그는 기숙사에 살았다! 기숙사는 센터와 같은 건물에 있었다), 가방에서 교과서 대신 손거울과 빗을 꺼내 머리손질에 여념이 없는 여학생, 내가 말만 걸면 울던 베트남 수녀님, 내 판서나 PPT 자료를 모조리 다 베껴 버리는 일본 여학생, 내 질문에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고 반응하지 않는 돌부처 모모 군까지. 그 누구와 팀이 되어도 그녀는 잘 지냈다. 학생들도 모두 아그네스를 따랐다. 그들도 아그네스와 말이 잘 통하는 눈치였다. 


좋은 선생이 좋은 학생을 만든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선생도 학생에게 영향을 받는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는 학생 앞에서는 기운이 빠지고, 반응이 없는 학생에게는 질문하기가 두려워지기도 한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준다지만 그들에게 다가가는 내 마음의 횟수까지는 조절할 수 없다. 



아그네스는 교환학생으로 먼저 한국어 수업을 들었고 이후 인도네시아에 돌아가 대학을 마친 뒤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내가 근무한 학교의 대학원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하며 중간에 한국어 수업을 듣기도 했다. 그녀는 교환학생으로 왔다가 대학원을 졸업한 2017년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그녀가 한국을 떠났던 시기를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캠퍼스 어디에서 만나든 그녀는 언제나 반가운 모습으로 인사했다. 그녀를 만나면, 항상 기분이 좋았다. 


복잡하고 서툴렀고 고달팠던 30대 어느 시간, 나는 아그네스가 내게 보낸 환한 미소 덕분에 일의 보람을 조금은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내게, 


선생이 선생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 것이다.




2021년 2학기가 끝나갈 무렵, 한 학생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조용해서 마음이 유독 쓰였던 인도네시아 학생이 보낸 편지였다.


저 사실 대부분 유학생들과 달리 다른 나라에서 오기도 하고 수줍음이 많은 편이라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친구를 사귀는 게 어려울 까봐 걱정됐었어요. 근데 선생님 과목을 통해 친구도 사귀게 되고 몇 명도 잘 되는 사이니까 다음 학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학을 하는 게 저의 삶에서 아주 큰 내디뎠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 순간이 걱정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죠. 그와중에 선생님이 저를 발전시켜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편지를 본 순간, 아그네스 생각이 났다. 그녀에게 받은 좋은 에너지를 다른 인도네시아 학생에게 전해줄 기회를 가졌다며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나는 오랜 만에 아그네스에게 메신저로 연락했다. 그녀도 내게 답했다. 오랜만이었고, 무척 반가웠다. 사진 속의 그녀는 몇 해 전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서로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그네스 씨는 아직 20대죠?”

“아녜요, 선생님, 저 30대예요.”


내가 30대에서 40대로 가는 동안 그녀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여전히 아그네스를 발랄한 20대 학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직장 생활을 겪은 사회인이라는 사실을 왜 잊었을까.


그녀는 현재 인도네시아 현지 게임 회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맡고 있다고 했다. 회사 대표가 한국인이라 통번역 업무가 많다고 했다. 한국앱을 인도네시아 현지에 맞게 개발하는 것도 그녀의 업무라고 했다. 그래도 여전히 한국어 공부가 필요해 예전 함께 배웠던 교재를 보며 복습하거나 드라마로 한국어 표현 등을 배운다고 했다. 변함없이 열심히 공부하며 살아가는 그녀가 참 예뻤다. 그녀는 변했지만 또 변함이 없었다. 그래, 변함이 없다는, 그 말…… 




40대가 되면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누군가 물었다.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더 지혜로워지지도, 더 여유로워지지도 않았다. 

가끔은 조금 지혜로운 척, 여유로운 척하는 데 능숙해졌을 수는 있을지도.


아그네스가 20대 학생에서 30대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동안, 나는 30대에도 40대에도 별 변화나 발전 등을 겪지 않았다. 왜 나는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수시로 자책하고 좌절했던 시간이 더 많았을 정도로.

우연히 날아온 한 학생의 글을 읽고, 나의 혼란스러웠던 30대에 아그네스가 내게 건넸던 미소를, 

그 에너지를 다른 학생에게 전달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내가 누군가의 선생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때도 지금도.

때로는 내가 더 나아가지 않고,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 다행일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오래 전, 아그네스와 나(아그네스 본인 제공)



아그네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 달라고 부탁했더니 다음과 같은 메일이 왔다. 


저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배치 시험에 말하기 시험에서 선생님을 처음 만났어요.. 

그때 선생님 모습은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했어요. 

아주 친절하고 밝은 모습으로 저를 인터뷰했어요. 저는 그 당시에 선생님 수업을 들을 수 있었으면 아주 좋겠다 라는 소원을 가졌어요.. 1년 뒤 (5급반)에 제 소원이 이루어져서 너무 행복했어요^^ (그래서 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온 모습을 보자마자 아주 큰 미소로 환영했었지요 ^^)


저도 선생님께 기운을 많이 받았어요. 선생님께서 교실에서 항상 밝은 모습을 보여주셔서 저도 선생님을 보고 좋은 기운을 받았지요 :)

저 매주 마다 선생님 수업이 기대되었어요.

선생님 수업은 아주 재미있고 아주 창의적으로 가르쳐주셔서 선생님 덕에 한국어 배우는 것도 아주 재미있었어요^^

결국은 우리 서로 기운을 주고 받았나 보네요^^



* 위의 글은 아그네스 씨 본인이 직접 확인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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