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젊은 인재, 교실 밖 한국을 달린다
이발소 사장은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항상 당당했다. 그 때 난 알았다. 가난이 가장 큰 장애라는 걸.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장애라면 가난은 가장 큰 장애였다.
드라마 <추적자> 주인공의 대사이다. 그는 가난하기 때문에 당당할 수 없어 공부에 승부를 걸었다. 그 결과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에 합격했다. 이후에는 괴물이 돼 버렸다.
내가 제일 처음 가르친 학생들은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계 아이들이었다(관련 포스팅: 조 선생은 왜 조 선생이 되었나?). 한국인과 어울릴 기회가 없었던 열 살 남짓의 한 여자아이는 나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내 무릎에 앉았다. 내게 안긴 그 아이는 생후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고 들었다. 가난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는 동남아시아 출신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쳤다. 의류 공장에서 일하던 한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내게 바지를 선물했다(관련 포스팅: 선생님, 허리 사이즈가 몇이에요?). 파키스탄 학생은 반짝이가 잔뜩 붙은 모자를 내게 주기도 했다. 내가 돈을 받지 않고 그들을 가르쳐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따뜻한 사람들이었고, 가족과 십 년 가까이 떨어져 지내던 외로운 친구들이었다. 그들도 여전히 가난했다.
세 번째로 미국에 위치한 한국어 마을에서 미국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쳤다(관련 포스팅: 너의 이름은, 1). 학비가 비싼 탓에 소위 있는 집 아이들이 많이 참가한다. 하지만 장학금 제공 혜택이 다양해 저소득층 아이들도 참가할 수 있었다. 비싼 학비를 한 푼도 내지 않고도 동등한 혜택을 받은 아이들이 한국어를 배웠다. 가난이 누군가에게 ‘장애’만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계기였다.
타미 트랜(Tommy Tran), 한국 이름 진태윤.
그는 내게 가난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고민해 보게 해 준 고마운 친구이다.
나는 그를 <한국어 마을>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지만, 한국어 사용 자체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항상 웃고 있었고, “안녕하세요?”라는 반가운 인사말로 모두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는 캠프에서 진행하는 모든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프리 허그”
그의 목에 걸린 A4 사이즈의 종이에는 “프리 허그”가 쓰여 있었다. 태윤이는 지나가는 이들에게 “프리 허그” 혹은 “허그 주세요”를 외쳤고, 다가오는 이들을 안아 주었다. 한국인들과 어울리는 순간이 마냥 좋다는 이 아이는 장학금을 받아 <한국어 마을>에 참가했었다.
태윤이의 부모님은 베트남 전쟁 시 미국으로 온 이민자였다. 비싼 학비를 내며 한국어를 배울 여유가 없었지만 주최측에서 제공한 장학금(Village Parks Scholarship)으로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다.
몇 년 후, 성인이 된 그를 한국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가 한국에 유학을 오게 된 것이었다. 10주간의 한국어 연수를 하고 있었는데, 한국 대학생들과 함께 어울리는 일이 재미있다고 했다. 그의 한국행도 누군가의 기부금을 통해 실현될 수 있었다. 그는 여러 혜택으로 한국에까지 와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리고는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It’s good to be poor.
가난해서 좋아요.
적어도 내가 조 선생이 된 이후로 만났던 가난은 이러했다.
가난한 집 태생으로 친부모와 함께 살 기회를 잃고,
기약 없이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외국에서 돈을 벌고,
배움의 기회도 박탈당하고,
본국의 대학 교수나 의사 출신이 타국에서 막노동을 하고…
그러나
태윤이는 내게 알려 주었다.
가난했기에 다양한 혜택의 우선 순위를 선점했고,
가난했기에 도움을 받아 배움의 가치를 깨닫고,
가난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감히’ 욕심 낼 수 없었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고
문득, 생각해 본다.
나는 언제쯤 이런 말을 다시 들을 수 있을까?
가난해서 더 많은 교육의 기회를 얻고,
가난해서 더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고,
가난해서 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그래서
가난해서 좋다고.
태윤이는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가난한 이민자 출신은 그의 성장 과정에서 장애가 아닌 기회가 되었다.
태윤이의 부모님이 훌륭했고, 태윤이 자신이 긍정적인 성향이 었지만, 그런 아이가 자신의 타고난 밝은 성향대로 자랄 수 있었던 건, 그에게 배움의 기회를 우선적으로 주었던 후원자의 마음과 사회 제도가 큰 몫을 했다고 본다.
태윤이는 현재 미국에서 IT 업계에 종사하는 어엿한 사회인이다. 여전히 한국어로 대화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한국친구와 어울리는 시간을 좋아한다고 했다. 태윤이와 메신저 상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 그의 웃음 섞인말투가 말풍선이 되어 팝업창에 떠오른다.
나에게 가난이 무엇인지를 알려준 진태윤,
그는 진정 유쾌한 철학자였다.
* 본 글은 진태윤 군이 두 차례 확인한 내용입니다. 본인이 사진을 직접 제공하지 않은 관계로 사진은 싣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