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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미 Feb 14. 2017

바몬드 카레, 그리고 타일러


카레가 먹고 싶다 했더니 카레가루를 보내 주었다.

조리 방법을 확인하려 뒷면을 보았다.

빽빽하게 써 있는 작은 글씨를 하나씩 읽어내려 가다가 이 부분에서 잠시 멈췄다.


버몬트(Vermont) 지방에서 나오는 벌꿀로…


그러니까

바몬드 카레의 ‘바몬드’는 ‘버몬트’였다.

당시 미국 버몬트 주에서 교환학생으로 체류 중이었는데,

(이전의 포스팅 "조 선생은 왜 조 선생이 되었나" 참고)

그곳에는 한국 카레 가루 한 봉지 살 수 있는 마트는커녕 한국인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카레를 공수해 왔고,

한국에서 받은 한국 음식 포장지에서 이 지방의 이름을 보는 순간, 괜한 전율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누가 나를 알아주기라도 한 것 같은, 일종의 위로이기도 했다.




몇 주 전, 미국 출신 방송인 타일러 (Tyler Rasch)가 모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막걸리를 만들어 보였다.

그의 막걸리는 특이했다. 자기 고향 특산품인 벌꿀을 첨가했기 때문이었다.


타일러는 버몬트(Vermont) 출신이었다.


'바몬드 카레'의 벌꿀과

'타일러 막걸리'의 벌꿀은

같은 지역의 특산품이었던 것이다.


내가 버몬트에 있었을 때, 타일러는 아마 여덟 살쯤 되었을 것이고,

버몬트 어느 지역의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을 것이고,

한국이란 나라를 모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나는,

미국 애들이 내게, 집에 세탁기나 냉장고가 있느냐고 물으면,

괜히 의기소침해져, 집에다가 한국 음식 좀 부쳐 달라고 칭얼대며 편지를 쓴 뒤,

그걸 들고 읍내로 추정되는 우체국에 가서,

어디 가는 우편물이냐고 묻는 직원에게 코리아, 코리아, 를 작은 목소리로 댔을 것이다.


그 시절 우리는

20여 년 후, 한국에서 한국말로 방송을 하는 버몬트 출신의 젊은이가 있을 거라고

상상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버몬트 지역의 한 식당에서

낯선 미국인이 내게 갑자기 다가와 빠른 속도로 말을 걸어

“미안하지만, 못 알아 듣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내게,

“그럼 중국어나 일본어로 말해 줄까?”

라고 비꼬았던 때도 있었다.

모욕감을 주는 말은 너무나도 귀에 쏙쏙 박혔다.


순박하고 착한 이들이 많고, 미국에서 '가장 하얀 주'라는 별명도 있다는 그곳에서

코리아를 모르는 이들과 함께 하는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쟤 정도의 피부톤을 띄는 동양인이라면, 중국인 아니면, 일본인이겠지, 코리아? 그건 어디 있어?

라고 반문하는 이들을 적지 않게 만났던 오래 전 그 곳, 버몬트에는,

또 하나의 변화가 일었다.

버몬트 소재 한 대학 프로그램에서 

한국어를 집중적으로 가르치게 된 것이다.


미들버리 대학교 Middlebury College의
미들버리언어학교 
Middlebury Language School


작지만 강한 대학으로 알려진 미들버리 대학교는 인문학이 강하고, 특히 몰입식 외국어교육으로 유명하다. 이 학교 산하, 미들버리언어학교(Middlebury Language Schools, http://www.middlebury.edu/ls)가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여름방학에 집중적으로 진행된다. 1915년 독일어학교를 시작으로, 프랑스어(1916년), 스페인어(1917년), 이탈리아어(1932년), 러시아어(1945년), 중국어(1966년), 일본어(1970년), 아랍어(1982년), 포르투갈어(2003년), 히브루어(2008년), 그리고 최근 2015년에 처음 문을 연 한국어학교까지 총 11개 언어학교가 있다.




타일러가 방송에 나와 한국인과 깊이 있는 대화를 이어갈 때면,

그에게 묻고 싶어진다.

“어디에서 그렇게 한국어를 잘 배웠어요?”

물론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대학이나 대학 부설 어학원의 이름이 아니다.

다른 대답을 듣고 싶은데,

그 또한 내가 기대하는 대답을 해 줄 것만 같다.



미제 벌꿀로 한국 막걸리를 만드는 타일러.


왠지 나는 그와 오래 전 어딘가에서 얘기를 나누었던 것만 같다.

그곳은 소들이 평화롭게 뛰노는 미국 북동부의 어느 지역이었을 수도,

승객들이 꽉 들어찬 지하철 2호선 어느 역을 지나는 순간이었을 수도 있겠지.


타일러의 막걸리가 가득 찬 잔을 들고

"건배"를 외치고 싶은 날이다.  




<타일러 라쉬 관련 참고자료>

http://mbn.mk.co.kr/pages/news/newsView.php?category=mbn00007&news_seq_no=3127953

http://comwel2009.blog.me/220844861774

http://news.mk.co.kr/newsRead.php?no=885199&year=2016


사진 출처

http://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229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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