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친구, 지금의 친구
너의 고향은 아가야 / 아메리카가 아니다. (중략) // 울지 마라 아가야 / 누가 널더러 / 우리의 동족이 아니라고 그러더냐 / 자유를 위하여 이다지도 이렇게 / 울지도 피 흘리지도 않은 자들이 / 아가야 너의 동족이 아니다. / 한국의 가을하늘이 아름답다고 / 고궁을 나오면서 손짓하는 저 사람들이 / 아가야 너의 동족이 아니다. (하략)
정호승, "혼혈아에게", <흔들리지 않는 갈대>, 1991년, 미래사
지금은 다문화 가정 자녀로 불리는데 내가 어릴 때 만해도 혼혈아라는 말을 많이 썼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혼혈아는 정호승 시인의 혼혈아와는 달랐다.
다이안.
초등학교 입학 전에 다이안을 만났다. 아빠가 미국인이라고 들었는데 아이의 부모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지금이야 영어 유치원이 많아 “다이안 엄마, 시간 되면 우리 제니퍼랑 같이 놀아요.”라는 말이 일상적이겠지만 그 당시에는 친구 중에 “다이안”이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이는 귀를 뚫었고, 밝았고, 영어를 쓰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유일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나도 한때 다이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영미조
대학 입학 후 많은 신입생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강남역에 있는 영어회화 학원에 등록했다. 첫 시간이었다. 선생이 내 이름을 물어보길래 미국식으로 성을 뒤로 빼 대답한 것이다. 영어 강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국 이름을 쓰라고 했다. 영어 교과서의 주인공인 제인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덩치 큰 백인 남성이 미국 이름을 쓰라고 하니 왠지 위압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다이안.
오래 전, 영어를 쓰지 않은 그 아이의 이름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내 이름이 되었다.
“이름이 뭐니?”
“인수요.”
“그게 미국 이름이니?”
“아니요.”
“여기서는 미국 이름을 쓸 거야. 한국말 하면 안 돼, 알았어? 미국 이름을 말해 봐.”
하인즈 인수 펜클(Heinz Insu Fenkl, 1960~)의 소설 <고스트 브라더> 속 미국 학교 선생과 인수와의 대화이다. 작가는 한국인 어머니와 주한미군이었던 독일계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한국 부평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소설 <고스트 브라더>는 자전적 소설이다.
(152) 우리는 한국어를 했기 때문이 처벌을 받았다. 맥피 선생님은 우리를 야단만 치고 구석에 세워두었는데, 다른 선생님이 우리들 입술이 터지게 때리는 바람에 금지된 언어 속에 숨은 찝질한 피 맛을 보았다.
작가가 서술한 미국 학교에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많이 다녔다. “꼬불꼬불한 머리”를 하거나 “귀신처럼 하얀 피부”여도 한국어가 편한 아이들이 많았다. 이들의 아버지는 미군이었고 어머니는 한국인이었다. 아버지를 모르거나, 아버지가 죽었거나,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자주 쓰는 영어는 “헬로”뿐이었고, 그들의 어머니들 영어 또한 유창하지 않았다. 미국 학교에서 아이들이 한국어를 쓰면 벌을 받는 대신 “엄마한테 편지 받아오기” 숙제를 해야 했는데, 영어를 모르는 엄마가 “그런 걸” 편지로 쓸 수 없었기에 그 과제는 벌보다 더 혹독했다. 한국에 태어나 살아가는 이들은 한국어를 잊어야 했고, 미국인이 되는 교육을 받아야 했다. 물론 이것은 어머니들의 선택이기도 했다.
작가는 1960년생이다. 정호승은 1950년생이다. 그들 시대에 만난 ‘혼혈아’를 각자의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1946년생 김명인의 시도 그러하다.
東豆川 Ⅳ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 / 엄마를 닮아 얼굴만 희었다. /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하고 / 퇴학을 맞아 고아원을 뛰쳐 나가더니 / 지금도 기억할까 그 때 교내 웅변 대회에서 /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 마디 말 /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중략) // 그래 너는 아메리카로 갔어야 했다 / 국어로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 네 모습이 주눅들 리 없는 合衆國이고 / 우리들은 제 상처에도 아플 줄 모르는 단일 민족 / 이 피가름 억센 단군의 한 핏줄 바보같이 / 가시같이 어째서 너는 남아 우리들의 상처를 / 함부로 쑤시느냐 몸을 팔면서 / 침을 뱉느냐 더러운 그리움으로 / 배고픔 많다던 동두천 그런 둘레나 아직도 맴도느냐 / 혼혈아야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아이야
김명인, <東豆川>, 1979, 문학과 지성사
김명인은 동두천에서 국어 교사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시를 썼다. 그의 시 동두천 1~ 동두천 9까지는 그가 만난 동두천 학생들의 이야기이다.
2020년 오늘, 혼혈아가 다문화 가정 자녀로 이름이 바뀌었다. 여전히 “우리들은 제 상처에도 아플 줄 모르는 단일 민족”일까, “이 피가름 억센 단군의 한 핏줄 바보같이” 행동하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한국어 교사 초창기에 만난 학생들은 다문화 가정 자녀였으나, 몇 해 전부터는 한국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들의 자녀들이 차별 없이 한국어를 차근차근 배워가고 자녀들이 학교에서 “엄마한테 (한국어로) 편지 받아오기” 숙제를 무사히 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스트 브라더>에 등장하는 인수, 수지, 조니, 조나단, 간난이 누나 뱃속의 아이와 같은 아이들이 겪는 일들이 우리 교실에서 보일 수도 있겠다.
고스트 브라더(Memories of My Ghost Brother), 하인즈 인수 펜클, 문상화 옮김, 문학과 의식(2005)
(13)
우리는 이사 오기 전에 이 집의 집세가 싼 이유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이 집은 일제 때 한국사람 수만 명을 재미삼아 고문해 죽인 일본군 대령이 지은 집이라고들 했다. 그 사람은 돌로 치장한 정원에서 명상을 하는 것처럼 미소를 짓기도 했지만, 아무 죄도 없이 잡혀 온 희생자들이 고문당하는 것을 보기 위해 정원에서 차를 마시기도 했다는 것이다.
(14)
결국 엄마는 방 세 칸을 빌려 이모, 형부(이모부), 외사촌 용수와 혜순이가 한 방을 쓰게 했고, 시골에서 온 조카딸 간난이 누나가 또 한 방, 그리고 우리가 방 하나를 차지했다. 황씨 아저씨네는 다른 방을 썼고, 맨 뒷방에는 나가사키에서 돌아온 부부가 종기라는 불구 아들과 함께 살았다.
(15)
폭풍이 치는 밤은 특히 더 무서웠다. 바람소리와 들이치는 빗소리를 통해서 6·25 때 죽은 피난민들의 원성이 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134)
“미국 학교 어때? 한국 학교처럼 소풍도 가고 운동회도 한대?”
오후 늦게 조니를 만났다. 우리는 부평역 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미국 학교의 첫날을 조니에게 말해 주었는데 이상한 사람들, 맛없는 음식, 재미없는 수업 전부를 설명하기도 전에 동네 끝에 있는 논에 도착했다.
(143-144)
점심 시간 바로 전에 교장 선생님이 우리 교실로 들어와서 학교에서 절대로 한국말을 써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길,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오늘부터 학교시간에 한국말을 쓰는 것은 규칙위반’이라고 말했다. 나는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미국 학생들은 이 말이 웃긴다고 생각하고 크게 웃었다. 우리들은 식당으로 가는 길에 시무룩해졌다. 우리가 한국말로 소곤거릴까 봐 선생님들이 우리들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214)
슬픔 대신 갑자기 조니 나이가 궁금해졌었는데 조니는 나보다 세 살이나 많아서 조니 엄마가 조니를 용산에 있는 미국 학교에 입학시킬 때 나이를 바꿨었다. 조니가 영어를 못 했기 때문에 내 아래 학년인 1학년에 맞추어 들여보내려고 걔네 엄마가 실제보다 네 살이나 줄였었다.
(265)
친구도 없고 튀기라서 한국애들이 돌을 던진다. 백마장 집으로 엄마가 데려갈 때 뒤돌아서 나를 보던 제임스를 본다.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동두천에서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시로 묶어낸 국어 선생님, 김명인 시인.
1970년대에 동두천에서 고된 삶을 끌고 가야했던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준 선생님 덕분에 한국 전쟁을 겪지 못한 세대까지 그 당시 아이들의 아픔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분이야말로 참스승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