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영미 May 27. 2020

불평 많은 엄마들에게 고함

[이럴 땐 이런 책] 신경 끄기의 기술

(123) 자신의 처지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것과 자신의 상황에 실제로 책임을 지는 것은 다르다. 당신의 상황에 책임이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 자신이다. 당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불행을 책임질 사람은 오로지 당신뿐이다. 


내가 다니던 스포츠센터가 있다. 그곳에는 주로 동네 토박이들이 다닌다.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이 동네에서 살았는데, 스포츠 시설에 비해 사우나가 유난히 발달된 이 스포츠센터로 말하자면, 나의 성장과정과 함께 한 곳이다. 그 사이에 몇 번 망할 뻔한 적도 있었지만 이름을 바꿔가면서 존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오롯이 동네 터줏대감들 덕분이었다. 그리하여 이곳을 이용하는 회원들의 평균 연령을 가늠해 보면 대략 71.6세라 추정된다. 


연령대가 높다 보니, 어르신들의 대화를 종종 엿듣게 된다. 화제는 주로 에어로빅 선생님(수강생들에 비해 젊은 남성), 반찬거리(요즘에는 열무김치), 탈모방지 샴푸(머리가 새로 난다는 프랑스산) 등인데 그 중에서도 건강 보조제 이야기를 으뜸으로 친다. 그날도 어김없이 건강 보조제 이야기가 등장했다. 그날의 주인공은 바로,

“하벌 라이프”

몸이 깡마른 할머니는 자기가 허벌 라이프에서 나온 약을 먹고 나니 무릎 통증이 사라졌다는, 지극히 ‘약을 파는 발언’을 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한 눈에 봐도 무릎에 무리가 갈 정도의 과체중인 할머니가 그녀에게 다가와 목소리를 높이며 방금 말한 약이 뭐냐고 다그치듯 물었다. 

“어벌 라이프”

“어벌? 아까 허벌이라 안 했어? 허벌이야, 어벌이야?”

“흐어벌, 흐어벌”

말할 때마다 달라지는 깡마른 할머니의 발음에 인내심을 잃은 몸집이 큰 할머니는 한 손에는 팬티를 또 한 손에는 휴대폰을 쥐어 들고선 어딘가에 전화를 했다.

“야, 여기 옆에 권사님이 하벌 라이프 무릎 약이 좋대. 나 그거 좀 사줘 봐봐.”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딸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렸다. 딸은 하이톤의 목소리로 제 어미에게 난데없이 뭔 소리냐고 물었을 것이다. 

“몰라? 거 참. 기다려 봐. 여기 권사님하고 통화 좀 해봐.”

알몸에다가 목에 수건만 두른 권사님은 허벌, 어벌, 흐러벌 단어를 번갈아 읊조렸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제가 벗어놓은 팬티를 손에 쥔 할머니에게 휴대폰을 넘겼다. 수화기 속의 목소리는 다시 하이톤으로 올라갔다. 두 모녀는 다소 짜증스러운 대화를 이어갔다.

“애새끼 키워놔 봐야 소용없어.”

그녀는 팬티와 휴대폰을 동시에 라커 안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나 또한 그들의 대화를 계속 들어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허벌 라이프로 시작된 대화의 결론은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자식 새끼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 다들 제 새끼 챙기느라 바쁘고, 인터넷으로 약을 주문할 줄 모르는 무릎 상한 제 어미는 안중에도 없다.




나도 부모지만, 부모들이 하는 말 중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이거다.


“자식 키워봤자 아무 소용 없다, 다 필요 없어, 다 필요 없다고.”


(204) 자기 문제를 스스로 책임지고 상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게 진정한 사랑이다.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라는, 학창시절에 도덕인지 윤리인지 사회 시간에 배웠을 법한 말은 모두 거짓은 아닐지 심히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206) 상대가 신경 쓰는 모든 것에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상대가 어디에 신경을 쓰는지와 무관하게 상대에게 신경 쓰는 게 조건 없는 사랑이다.


자식을 키우는 일에는 품이 든다. 또한 자식 맘도 내 맘 같지 않다. 내가 고생한 걸 자식이 똑같은 강도로 체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무릎은 자식의 무릎이 아니고, 너도 내가 아니다.

“자식 키워봤자 아무 소용 없다, 다 필요 없어, 다 필요 없다고.”

저 말도 씨알이 안 먹히면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악담을 하듯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도 늙어 봐라.”


네, 네, 암요, 늙어가고 있습죠. 임영웅의 노랫말을 빌리자면 “익어가는 중입니다.”

잘 익어가려고 책도 읽습니다. 


오늘의 “이럴 땐 이런 책”은 <신경 끄기의 기술>입니다.


출처: 알라딘


(123)

 우리는 항상 ‘경험’을 책임지며 살아간다. 그것이 ‘내 잘못’으로 생긴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것은 삶의 일부다.

 책임과 잘못이라는 개념의 차이를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잘못은 과거 시제고, 책임은 현재 시제다. 잘못은 과거에 선택한 것의 결과이며, 책임은 지금 이 순간 선택하는 것들의 결과다. 당신은 이 책 읽기를 선택하고 있다. 이 개념들을 생각하기를 선택하고 있다. 이 개념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를 선택하고 있다. 당신이 내 발상을 설득력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마도 내 잘못일 거다. 하지만 당신이 스스로 어떤 결론을 내리는 건 당신 책임이다. 내가 이 문장을 쓰기로 선택한 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이 문장을 읽거나 읽지 않기로 선택한 건 당신 책임이다.

 (196)

무엇을 거부할지 선택하라. 그것이 너다. (중략) 하지만 거절해야 할 건 거절해야 한다. 뭔가를 거절하지 않는다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다른 것보다 더 낫거나 바람직한 것이 전혀 없다면, 삶은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고, 결국 우리는 가치 없고 목적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거절하거나 거절당하는 걸 피하면 마음이 편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거절을 피하는 행위는 단기적인 쾌락과 함께 장기적인 방황을 선사할 뿐이다. 

 뭔가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자신을 거기에 제한해야 한다. 인생의 의미와 즐거움에는 수준이 있다. 수준 높은 의미와 즐거움에 닿으려면, 하나의 관계, 기술, 직업에 수십 년을 바쳐야 한다. 한 가지 일에 수십 년을 바치려면, 나머지 선택지를 거부해야 한다.

 하나의 가치를 선택하려면, 나머지 가치들을 거부해야 한다. 결혼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선택했다는 건, 코카인 파티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205)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할 때는 ‘스스로 원해서’ 해야 한다. 의무감으로 또는 희생하지 않았을 때 생긴 결과에 대한 두려움으로 희생하면 안 된다.

(206)

 경계가 분명한 사람들은 짜증이나 논쟁, 상처받기를 겁내지 않는다. 경계가 흐릿한 사람은 이런 걸 두려워하고, 언제나 롤러코스터를 타는 감정 기복에 따라 행동한다. 경계가 뚜렷한 사람들은 두 사람이 서로 100퍼센트 일치하거나 상대의 욕구를 전부 충족하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이들은 자기가 때로는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상대의 마음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이들은 건전한 관계란 서로의 감정을 조종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대의 성장과 문제 해결을 돕는 관계라는 것을 안다. 상대가 신경 쓰는 모든 것에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상대가 어디에 신경을 쓰는지와 무관하게 상대에게 신경 쓰는 게 조건 없는 사랑이다.


* 대문 사진: 픽사베이



매거진의 이전글 부부의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