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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미 Jun 02. 2020

지하철 안 포켓북

강다니엘 응원하기 & 외국어 공부하기

출발, 정지, 위험, 주의, 화장실, 약냉방차, 노약자, 장애인, 임산부 보호석, 열차와 승강장 간격 넓음


지하철 혹은 지하철역에서 본 한국어를 찾아 오라는 숙제를 냈다. 학생들은 위와 같은 단어 및 표현을 적어왔다. 잘 썼다. 흔히 보는 말들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행이 처음이었다. 말레이시아 여학생과 미국 남학생 각각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럽 출신 학생이었다. 이들은 한국어를 처음 배운 학생들은 학습 속도가 빨라 이제는 제법 한국어로 말도 잘하고 타이핑도 잘 해내고 있다. 나는 이들에게 천재라는 단어를 알려줬다.


교실 밖에서 찾은 한국어를 써 보라는 숙제는, 초급반 학생들에게 종종 내준다.

기억하는가?

내가 외국어를 처음 배웠을 때 교실 밖에서 그 언어를 정확히 읽어냈을 때의 성취감을 말이다.




2015년 7월 내가 대만에 처음 도착했을 때 간판에 쓰인 ‘약국(藥局)’을 읽고 중국어가 보이기 시작한다고 흥분했었다. 사실 대만의 번자체는 한자와 동일해서 중국어로 발음을 못해도 읽을 수는 있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역이름이나 상표 등을 읽고 나서는 혼자 기뻐했지.


심지어 우리집 주소를 중국어로 완전히 써 냈을 때에는 내 자신을 향해 박수라도 쳐 줄 기세였다. 외국어를 처음 배울 때에는 자주 성취감을 느낀다. 물론 배우면 배울수록 좌절하는 순간도 그 못지 않지만…


한국어의 경우, 학생들이 자모는 제법 빨리 떼고 단어도 쉽게 읽어간다. 이때까지는 대부분 즐거워한다. 문제는 다음부터이다.

동사 및 형용사 활용, 즉 가다-가요-갑니다, 먹다-먹어요-먹습니다, 를 실컷 배우고 얼마 지나, ㄹ탈락 용언까지 욱여 넣듯이 배운 뒤, “살다-살요-살습니다”라고 쓰면서 “한국어는 역시 오래 배울 언어는 아니구나”라며 포기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 학생들은 아직 그 단계까지는 아니고,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읽고 받아쓸 수 있는 단어나 표현이 보이는 걸 무척이나 기뻐하는 ‘해피 해피 학생들’이다.

학생들이 이번에 적어온 글은 예전과는 달랐다.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지하철역 내 부착된 포스터



마스크와 손 씻기는 그렇다 쳐도, 이들은 '착용', ‘사회적 거리두기(생활 속 거리두기)’라는 고급 표현을 배우게 되었다. 닥치면 수준 높은 말도 배워진다. 나는 대만에서 강도 6.8의 지진을 한 차례 겪고 나서부터는 “지진은 좌우로 움직이는 것보다 상하로 움직일 때 더 위험합니다.”라는 문장을 중국어로 구사할 수 있었다.


또 다른 학생들은 이렇게 말했다.

“지하철에서 케이팝 스타들의 생일 축하 메시지도 많이 봤어요.”

당연하다. 지하철이야말로 내 스타를 응원하기 좋은 장소이다. 전광판 설치에 일조한 바는 없지만 내 스타 사진은 내가 찍는다.


2019년 강다니엘 생일을 맞아... 압구정역




참고로 내가 대만에서 가장 좋아하는 지하철 안 표지판은 이것이었다.


역내에서 음료, 음식물 섭취 시 벌금 NTD 3000


대만돈 3000원은 한화 약 122,550원이다(대만 환율이 올랐다. 오늘의 대만 환율 대만 달러 1원=한화 40.85원). 나는 실제로 지하철 안에서 음료를 마시다가 다른 승객의 고발로 저 벌금을 낸 대만인을 알고 있다!


한국에도 이 안내문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나는, 군만두를 손으로 집어 먹는 승객을 종종 마주한다. 저 기름진 손으로 어디를 만질까? 아무데도 혹은 아무도 안 만진다 해도 역이나 열차 내에서 음료나 음식물 섭취는 자제하면 어떨지.


지하철은 내가 살아내야 할 일상과 그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믿는다. 물론 타인에 대한 배려도 함께 배워가는 우리 모두의 공간이기도 하다.



* 지하철과 버스 탑승 시 꼭 마스크를 착용하라고 안내했으며, 불필요한 이동은 조심해야 한다고도 알렸습니다.



** 대문 사진 출처: 광화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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