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차, 길
두 번째 직장을 그만 두고 일이 없을 때였죠.
대학 졸업 후 들어간 첫 직장의 동료들이 입사 10주년 기념 모임을 한다기에 나갔습니다. 그 모임에서 느꼈던 복잡한 감정들을 글로 쓴 적이 있었죠.
그리고 다시 십 년이 흘렀습니다.
동기들은 20주년 기념 모임을 했다네요.
하지만
이번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고의가 아니었어요.
대만에 있으니까요.
이제, 제 '걷기의 역사' 이야기를
시작해도 될까요?
강남 역이었다. 나는 벼룩시장을 손에 쥐고 걷고 있었다. 지하철에 오른 뒤 벼룩시장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한 동안 학원 강사 모집 광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그 날, 사표를 제출하고, 책상 서랍을 비우고, 목에 걸고 다니던 카드를 내 주고 나왔다. 지하철 문이 닫혔다. 굳게 닫힌 문 위에 펼쳐진 커다란 노선도를 보았다. 강남, 역삼, 선릉……신촌까지는 한참이나 남았다.
발에 맞지 않은 신발을 신은 것 같다는 변명을 둘러대고 사표를 냈다. 피식, 실소가 났다.아무리 생각해도 웃기는 이유였다. 광고란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빨간펜을 꺼내 국문과 출신의 학원 강사를 모집한다는 곳에 동그라미를 쳤다. 다음 역은 신촌이라는 안내방송을 듣고 급히 빨간 동그라미를 셌다. 총 다섯 개였다. 만 원짜리 다섯 장을 공짜로 얻은 양 기분이 좋아졌다.
신촌 역에서부터 한참을 걸어 학교에 들어섰다. 건너 편으로 가려는데 언덕을 향해 올라가는 승용차들이 끊이지 않아 번번이 기회를 놓쳤다. 이 학교에는 신호등이 필요할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승용차를 따라 언덕으로 올랐다.
교육대학원 사무실 앞에서 전공, 강의 제목과 강의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학생증을 받았다. 학생증 속의 사진은 회사 아이디 카드에 붙은 사진과 동일한 것이었다. 추운 교실로 들어가 세 시간 가까이 수업을 들었다. 의자가 너무 딱딱했다. 어쩌면 굳어있는 것은 내 마음일지도 몰랐다. 수업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언덕을 다시 걸어내려 왔다. 내 옆으로 줄지어 내려가는 승용차는 세 시간 전, 언덕을 오를 때 만났던 차들이 아니었을까? 동창생 같은 그 친구들을 하나씩 눈으로 훑어갔다.
“경영대학원에 다니는 사람들 차일 거야.”
나와 함께 교육대학원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 전공이라는 신생학과 입학생 친구의 말이었다. 나는 여전히 내 옆을 지나가는 승용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리가 아팠다. 나를 태워줄 차가 한 대만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다음 날, 등록금을 내고 남은 퇴직금의 일부를 들고 운전 학원에 가서 등록을 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을 위한 투자였다. 한국어 교육 전공은 교육대학원 소속이지만, 졸업해도 교사자격증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되새겼을 때(초창기에는 그러했으나 , 이후 한국어교원 자격 제도가 생겼다. 전공자라 졸업 후 한참만이었으나 자격증을 받을 수 았었다 )줄지어 내려가는 교내의 승용차들을 힘 없이 바라보았을 때, 나는 이미 결심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자격증을 하나 따겠다고.
그렇게 나는,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부터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운전을 하지 않는다. 면허를 따고 몇 년 뒤, 운전을 하다가 큰 사고를 냈고, 차를 폐차시켰다. 그리고 몇 년 뒤, 대학원 졸업 후 오 년 이상 근무했던 학교를 그만 두었다.
작년이었다. 입사 십 주년 기념회를 하자며 예전 회사 동기들이 연락을 해 왔다. 총 오십 명의 동기가 있었는데 퇴사한 동기들도 모이는 큰 자리를 마련했으니 꼭 참석하라는 말에, 무엇보다도 십 년 동안 변해있을 오랜 친구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다시 강남 역으로 갔다.
머리가 슬슬 벗겨지기 시작한 동기, 애를 셋이나 낳았다는 동기, 분당으로 이사 갔다는 동기. 모두에게는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회사에 남아있는 그들 모두의 이름은 과장님이었다.
“영미 씨는 요즘 뭐 해?”
나는 고기를 뒤집다 말고 대답했다.
“그냥, 집에 있어.”
“제일 좋은 거 하네.”
뒤집던 고기를 집어 들었다. 그 때, 옆에 있던 동기가 팔꿈치로 나를 찌르며 말했다.
“왜 밥 그릇에 고기만 담아 두고 그래? 욕심은 많아 가지고.”
고기 세 점이 올라간 밥 그릇을 내려다 보았다. 그 식어 버린 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십 년 동안 내가 얻은 세 가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문득 그것이 궁금했다. 그러고는 고기 하나를 들고 씹었다. 고기가 딱딱했다. 십 년 전 교육대학원 첫 수업에 앉았던 의자만큼이나. 혹은 그 때 내 마음만큼이나.
동기들이 건네 준 명함을 지갑에 넣을 때, 정말 딱딱한 뭔가가 손에 집혔다. 운전면허증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일본 학생으로부터 받은 명함도 있었다. 대학에서 처음 한국어를 가르쳤을 때 만난 학생이었는데, 그는 나를 만난 이후로도 꾸준히 한국어를 계속 공부해서 꽤 괜찮은 무역회사에 취직을 했다고 했다. 얼마 전, 내 손에 있는 딱딱한 그것은, 그 학생이 한국으로 출장을 왔을 때 내게 건네 준 명함이었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그 학생의 한 마디가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그냥 집에 있는 게 일하는 것보다 백배 낫다는 동기의 말보다 훨씬 기분 좋은 칭찬이었다.
“영미 씨 건, 내가 내 줄게.”
지갑에 명함을 넣고 회비를 꺼내려던 내가, 옛 학생과의 추억만 떠올리고 지갑을 그냥 닫아 버리자 옆에 있던 한 동기가 자기 회비와 내 회비를 합친 사만 원을 냈다. 나는 그럴 필요 없다며 그 친구를 향해 손사래를 치다가 밥그릇을 엎었다. 남은 고기 두 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고기와 밥풀 따위를 손바닥으로 쓸어 모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몇은 이차를 간다고 했고, 몇몇은 제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갔고, 몇몇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나는 남편이 데리러 올 거라는 말을 둘러대고는 동기들을 모두 보냈다. 그리고, 혼자 걸었다. 도로에는 십 년 전처럼, 아니, 십 년 전보다 차가 많았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걷고 있었다. 함께 걸을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휴대폰의 폴더를 열었다. 저장된 목록을 하나씩 훑어갔다.
나딤, 마키코, 미르야, 마크, 알렉스, 원정정, 후세인……
웃음이 났다. 그들의 이름과 함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리고 내 옆으로 질주하는 차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나딤, 마키코, 미르야, 마크, 알렉스, 원정정, 후세인……
강남역에서 한참을 걸어가며 수많은 외국 이름을 불러 보았다. 어딘가에 있을 그들은 천천히 걷는 나보다 훨씬 빠르게 질주하며 힘차게 삶을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나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삶을 살아갈 그들, 지구 어디에선가 자기 자리를 잘 잡고 살아갈 그들은 여전히 나의 학생일까?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한국어 선생일까?
바람이 찼다.
추위에 한참을 걸으니 발이 시려왔다.
택시를 잡아 탈까, 버스를 탈까 고민만 하다가 어느새 집까지 걸어왔다.
참, 오래도 걸었다. 오십 분, 아니 십 년 동안.
걷기의 역사, 10년.
때로는 혼자, 때로는 함께,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신나게 걸었지만 다행히 신발은 내게 맞았나 보다.
오래 걸어 왔고, 앞으로도 더 오래 걷고 싶은 바보 같은 생각이 떠나질 않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