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 경단녀가 경단녀에게

오십을 앞두고 진로 고민에 빠진 나에게 친구가 해준 말

by Sori

같은 학과, 같은 동아리에서 휴학 기간 포함 5년을 함께 보낸 친구가 있다. 썩 잘 맞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세월과 환경을 따라 절친 중 한 명이 되었다. 필요 이상으로 고민이 많았던 내 20대의 이야기들을 들어주었고, 생활 면에서 한참 미숙하고 철없던 나를 보좌해 주었다.


30대에 접어들며 친구는 긴 출산과 양육의 터널에 들어섰고, 나는 뒤늦게 시작한 대학원 생활과 일로 정신없이 지내다 30대 후반 결혼과 함께 소도시로 이사했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친구,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시간의 부족과 물리적 거리 탓에 점점 연락이 소원해졌다. 그럼에도 20대에 만난 친구여서인지 마음속에서는 늘 손꼽히는 친구였고, 어색함 없이 언제라도 연락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무리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함께 보낸 사이라도 '공유하지 못한 시간이 주는 거리'를 인정해야 하는 때가 온다. 마음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공유한 삶이 부족해서다. 가까웠던 이들로부터 그런 거리를 느끼는 횟수가 늘어날 즈음, 나는 중요한 시절을 공유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 다시 친구에게 연락하기 시작했다.


친밀함은 여전했지만, 아파트 대단지에서 또래 엄마들과 10여 년을 함께한 친구의 삶 속에 내가 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 결혼과 동시에 시골로 이사해 이렇다 할 깊은 관계를 만들지 못한 내가 느끼는 '소중함의 밀도'와는 다른 것 같았다.


낯섦과 시간을 뺏는 미안함에도 불구하고, 먼저 세 아이를 키우는 친구에게 선배 엄마로서의 도움을 얻기 위해 연락하기도 했다. 기질이 다른 첫째 아이를 키우며 버거움이 최고조였던 때,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두서없이 감정을 쏟아냈다. 그때 친구가 들려준 짧은 공감의 말 한 마디가 놀랍도록 큰 위로가 되었다.


▲이렇다 할 전문성이 없는 현실 속에서 막막함, 초라함, 박탈감, 상실감 같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부대끼며 높은 벽 앞에 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andrewtneel Donations - paypal.me/AndrewNeel


몇 달 전에도 다시 친구에게 연락했다. 이번엔 내 진로 고민 때문이었다. 곧 오십을 앞둔 나는, 서른을 앞뒀던 때처럼 '진로'라는 화두 앞에 서 있다. 뒤늦게 결혼과 출산, 양육의 시간을 보낸 나는 둘째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올해 초부터 사회적·경제적 존재로서의 나 자신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12년의 경력단절, 그리고 이렇다 할 전문성이 없는 현실 속에서 막막함, 초라함, 박탈감, 상실감 같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부대끼며 높은 벽 앞에 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끝없이 우울하던 6월 말, 뭐라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언제나처럼 담담히 내 얘기를 들어주며 자신의 경험을 통해 예상치 못한 지혜와 용기를 건넸다.


핵심은 이랬다.
"준비 기간 1년, 진입을 위한 시도 기간 1년을 각오해. 방향은 두루뭉술해도 괜찮아. 지자체 강좌를 찾아보고, 조금이라도 관련 있어 보이면 앞뒤 따지지 말고 일단 신청해... 잘못 짚을 수도 있지만 괜찮아."


혼자만의 끝없는 생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가상의 실패 경험을 쌓는 내 기질을 너무 잘 아는 친구가 건네는 보너스 조언이었다. '준비 기간에 실패도 포함될 수 있다'는 말이 생각보다 큰 여유와 용기를 주었다.


서울과 달리 지자체 교육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실망하던 중, SNS에서 기적처럼 한 글쓰기 모임 모집 글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앞뒤 따지지 않고 신청했다.


친구 역시 작년부터 사회로 다시 발을 내딛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아직 완전히 자리를 잡은 건 아니지만, 이제 막 그림책 강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우연히 내 첫째 아이와도 온라인 그림책 수업을 하게 되었고, 나는 친구의 사회 재진입을 응원하며 수강료를 보냈다. 그리고 반복해 말해준다.


"너는 합당한 페이를 받는 게 당연한 강사야."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 책 정보를 주고 받으며 짧게나마 서로의 불안정한 여정을 응원한다. 예전처럼 늘 붙어있진 못하지만, '다시 응원하는 사이'가 되어 든든하다. 함께하기 위해 수고했던 우리의 지난 관계가 추억에 머물지 않고 다시 힘을 발휘하는 것이 고맙다. 딱 한 발 앞선 자리에서 건네는 친구의 위로와 격려, 그리고 조언은 그 어떤 지침서보다 강력했다.


그렇게 7월부터 시작된 나의 글쓰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글을 쓰며 나를 새롭게 발견해 가고 있다. 글쓰기와 함께 시작한 독서 지도사 과정도 곧 마무리를 앞두고 있다. 아직 눈에 보이는 결과는 없지만, 나는 지금 알찬 4개월을 보내는 중이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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