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룽지 사탕은 이제 못 받지만
“할머니, 안녕하세요?”
“아이고, 우리 애기들. 어디 가? 이뻐 죽겄어, 아주 그냥.”
차 뒷좌석에서 창문을 열고 목청껏 인사를 건네는 아이들에게 할머니는 못지않은 씩씩함으로 응답하신다. 보행 보조기를 끌고 종종 옆 동네로 마실을 다니시던 ‘베프 할머니’를 마주치는 일이 언젠가부터 뜸해졌다.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아 괜스레 마음이 쓰인다. 씩씩하고 피드백이 좋으신 주황 지붕 집 할머니는 우리 가족 사이에선 베프 할머니로 통한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세 분이셨던 동네 할머니 중 이제 베프 할머니 한 분만 남으셨다. 늘 부지런히 꽃밭과 농작물을 가꾸셔서 동네를 빛내주셨던 초록 지붕 집 할머니,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주머니에서 누룽지 사탕을 꺼내 주셨던 아랫집 할머니는 차례로 돌아가셨다.
정확한 연세를 알 순 없지만, 세 분은 오랫동안 이 마을에서 이웃으로 지내셨다. 지금은 대여섯 집이 더 지어지고 그만큼 이웃이 늘었지만, 처음 이사 왔을 때 우리 동네는 이 세 분의 집과 왕래가 거의 없는 의사 선생님 집, 이렇게 네 채만 있는 아담한 마을이었다.
동네 할머니들과 첫째 아이가 가까워진 것은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깨를 함께 털면서다.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거실 창밖으로 할머니 두 분이 밭에서 깨를 털고 있는 모습을 본 첫째는 단번에 달려 나갔고, 곧 깨 터는 팀에 합류했다.
대화의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80대가 훌쩍 넘은 할머니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깨를 털고 있는 여섯 살 첫째의 모습이 신기했다. 사람 좋아하고 편견 없는 아이에게 꼬부랑 할머니들은 나이 차가 많아 대하기 어렵고 처음이라 서먹한 사이가 아닌, 그저 함께 얘기 나누고 놀 수 있는 존재였을 거다. 오작교가 되어준 아이 덕에 그날 이후 나도 할머니들에게 좀 더 살갑게 다가갈 수 있었다.
구부러진 허리와 작은 몸으로 쟁기질과 호미질하시는 모습이 창밖으로 보이면 아이들을 통해 음료수를 건네고, 더운 날엔 아이스크림을 가져다드리곤 했다. 어느 새해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스티커를 붙인 떡을 준비해 아이들을 시켜 배달시켰다.
떡을 들고 신나게 뛰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 문을 두드리자 나오신 할머니가 기뻐하시며 아이들의 몸과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 배달을 마치고 임무 완료를 알리듯 우리 집 거실을 향해 손을 흔들던 아이들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남아있다. 멀리서 바라보는 마음이 두둑하고 따뜻했다. 작은 나눔에 할머니들은 시시때때로 좋은 말씀과 콩과 상추, 감자로 화답해주셨다.
아쉽게도 할머니들과의 추억은 길지 못했다. 이사 온 지 몇 달 안 되어 초록 지붕 할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고, 두 분은 여생의 대부분을 자녀분 집과 병원에서 보내셨다. 그 과정 중에 병간호하시던 할머니에게서 암이 발견되어 결국 먼저 돌아가셨고, 두 달 후에 할아버지도 소천하셨다. 아랫집 누룽지 사탕 할머니도 언젠가부터 집안에서만 지내시다 요양원으로 옮기시더니 이 년 전 운구차를 타고 오셔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셨다.
초록 지붕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연달아 돌아가셨을 때 나와 남편도 충격이 작지 않았고, 정 많은 첫째에게는 한동안 부고를 알리지 못했다. 지금도 아이들은 가끔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생각나고, 볼 수 없어 슬프다’ 말하곤 한다. 오늘처럼 베프 할머니와 인사하고 나면 “할머니는 언제 돌아가실까? 할머니까지 돌아가시면 너무 슬플 것 같은데”라며 아직 마주하지 않은 할머니와의 이별을 걱정한다.
마실 다니시는 할머니가 눈에 자주 띄지 않아도, 할머니 집에 불이 켜져 있지 않아도 “요즘 할머니가 잘 안 보이시는데?”, “계속 불이 안 켜져 있는 것 같은데?”라며 마음을 쓴다. 아이들은 동네 어르신들을 통해 죽음에 대해,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에 대해 어렴풋이 배워가고 있는 것 같다.
초록 지붕 할머니가 자녀분 집에서 지내시다 잠시 집에 들르셨을 때,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가 반가웠는지 첫째가 초록 지붕 할머니와 베프 할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셔 온 적이 있었다. 언덕진 길이 난관이셨을 텐데, 여덟 살 아이의 초대를 거절하지 못해 보행기에 의지해 힘겹게 오르셨을 거다.
“할머니들에게 엄마 요리 솜씨 좀 보여드려.”
라는 아들의 황당한 요구와 깜짝 방문에 당황한 나머지 데크에 모셔 음료만 대접한 것이 지금도 아쉽다. 젊은 사람들이 지은 집이 궁금하셨을 텐데, 두 분이 우리 집에 함께 오신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에서 집 구경 한 번 제대로 시켜드리지 못했다. 장난감으로 난장판인 집안 상황과 부족한 음식 솜씨보다,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들과의 시간을 알아차리지 못한 미안함이 무겁게 남아있다. 아이만큼만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할머니들이 돌아가신 후 대여섯 채의 집들이 지어지면서 이웃의 수는 늘었지만, 작은 동네에서 얼굴 마주칠 일이 거의 없다. 차로만 오가다 보니 동네를 걷는 사람을 볼 일도 없다. 10대가 되면서 야외 활동이 줄어든 우리 아이들마저 걷지 않는 동네가 휑하다. 초록 지붕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관리되지 않는 밭들은 순식간에 잡초가 자라 깔끔하고 아늑했던 첫 동네의 이미지도 사라졌다. 느리게 오가시던 할머니들의 발걸음이 주었던 생기가 새삼 그리워진다.
처음 시골로 이사 와 온몸으로 겪는 낯섦과 이렇다 할 보안 체계 없는 주택에서 느낀 두려움을 걷어내 주셨던 할머니들의 품이, 우리 가족이 ‘우리 집’에 잘 마음 내릴 수 있었던 이유였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며 감사하게 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눠주신 이웃의 정이 시골살이 내내 마음 한편을 든든히 지켜주고 있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이렇다 속 얘기를 나누지 않아도, 수십 년의 나이 차이가 나도, 작은 관심과 열린 마음이면 충분히 이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도시에서라면 많은 사람 중 하나로 흘려보낼 관계였겠지. 한 사람의 존재가 큰 시골살이를 통해 관계의 중심으로 들어온 세 분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아이라는 이유로 그저 받아주시고, 예뻐해 주셨던 수용의 경험이 아이들의 마음에도 이웃이라는 이름을 따뜻하게 기억하게 할 것이다. 할머니가 나눠 주신 누룽지 사탕처럼 구수하고 달콤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자리잡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