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되기'에 몰두하는 남성들
"김유정은 번쩍이는 뭔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칼이다’ 하는 생각이 들자 온몸이 오싹해졌다. 인력거꾼은 재빠르게 앞으로 달려갔으나 김유정이 더 빨랐다. 그는 인력거채를 움켜잡고 나에게 소리쳤다. '녹주, 오늘 밤은 너를 죽이지 않으마. 안심하고 내려라.' 그가 들고 있던 것은 하얀 몽둥이였다."
"엊저녁에는 네가 천향원으로 간 것을 보고 문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를 않았다. 만일 그 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단 며칠 목숨이 연장될 따름이니까.” - 박녹주 [나의 이력서] 중
소설가 김유정은 악명높은 스토커였다. 2년 동안 명창 박녹주를 지독하게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고 살해 협박을 일삼는다. 이 사실을 알면 더 이상 김유정의 소설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따위로는 보이기 어려워진다.
며칠 전에 어떤 분이 제목이 "왜 안 만나줘"로만 된 기사 제목만 모은 것을 봤다. 그저 안 만나준다는 이유로 남자들은 여자들을 향해 디지털성폭력, 폭행, 협박, 살인, 빙초산뿌리기, 방화, 절도등을 저지르고 있었다. 김유정의 후예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이들이 저지르는 일들은 극단적인 경우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하지만 평범한 남자들조차 나를 안 만나주는, 혹은 내게 관심 안 가져주고, 무시당했다는 기분이 들게하는 여자들을 원망한다. 가벼운 케이스로는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어긋나버린 첫사랑에 대해 "쌍년"이라고 말하는 승민같은 남자들이 있다. 약간 소름 돋는 케이스로는 "카페에 단 둘인데 나한테 1도 관심 없다"며 같은 공간에 있던 여성을 몰래 찍어 올리는 윤정수씨가 있다.
많은 남성들이 이성과의 관계에서 무시당하고 외면 받았다는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가볍게는 원망의 말을 던지고, 무겁게는 복수한다며 범죄를 저지른다. 엄연한 젠더권력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사회에서 그들의 생각은 좀 황당하긴 하지만, 어쨌든 '좌절한 남성'의 모습에 공감하고 자신을 투영하는 이들은 꽤 많다.
나라고 뭐 크게 다를까. 스무살에 잠깐 만난 친구가 있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는데, 아무튼 나는 그와 연인이 될 수 없었다. 그 이후로도 간간이 연락을 이어가다가, 몇년 후엔가 뜬금없이 그에게 술김에 "잘 먹고 잘 살아라"식으로 비아냥거리는 문자를 보낸 기억이 있다. 한때는 "뭐 찌질할 때도 있었지"라고 생각했던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 역시 여성에게 인정받지 못한 '불쌍한 피해자인 나'로 스스로를 규정해온 것이다.
비슷한 상황 (관계의 파국 혹은 어긋남)이라도 여성과 남성의 대응 방식은 다르다. 이나미 신경정신과 의사는 "(이별후) 여성은 먼저 자책을 하고, 남성은 남의 탓을 먼저 한다"꼬집는다. (출처: http://bit.ly/8OCvyz) 이 차이는 사실 남성과 여성의 권력차에서 기인하는 부분이 크다.
대표적인 '여성혐오'중 하나지만 여성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남성들이 다수 존재한다. 내 소유물이 나를 함부로 떠난다? 나를 무시한다? 내 말을 안 듣는다?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이별(거부)의 원인을 오로지 여성에게 두고, 이별의 '피해자'로서 정당한 복수를 하겠다는 게 '이별 폭력' 가해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생각이다. 그리고 가부장제 사회는 가정폭력, 데이터 폭력, 디지털 성폭력 등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며, 이런 생각을 사실상 방조했다.
법원은 '남자가 무시당한' 상황에 예민한 것 같다. 아내를 살해한 남편을 두고 "다소 남성적인 성격의 피해자는 거래처 사람들과 잦은 술자리를 갖고 나이 어린 피고인을 무시하였으며" (2009고합72)이런 말을 재판문에 써놓고 집행유예를 선고한 적도 있다.
어쩌면 '(여자에게) 무시당하면 안 된다'는 현재 한국 남성들의 집단적 히스테리일지도 모른다. 실은 당신들이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해도 남성들은 요지부동이다. 감히 말하건대 "보편이 되기 위해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도 없었고, 여성을 타자화함으로써 위치를 확보할 수 있는 자원도 없는" (권김현영, <근대전환기 한국의 남성성>)식민지 남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현재의 남성들은 식민지, 내전, IMF 등을 거치면서 무너진 국가, 망해버린 아버지에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여성들을 자기보다 못한 존재로 타자화하면서 보편의 자리를 차지하기엔, 여성들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전히 정상가족을 만들어, 가족을 지키고 생계를 부양할 수 있는 '남자다움'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남자다움을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보편적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결핍'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성들은 '피해자 되기'의 방식을 택한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가해'를 받아서 고통을 겪는 척을 하며 사회적 압박과 책임을 피한다. 이런 움직임이 고착되어 가부장제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이 여성을 탓하는 방식으로 해소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무수히 많은 군대 문제들에 대한 분노가 갑자기 '군 가산점 위헌 반대'나 "여자는 왜 군대를 안 가냐"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성폭력 가해자들을 두둔하는 이들을 흔히 '남성연대'라고 말하는데 , '남성연대'는 기득권의 커넥션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자신들을 약자로 규정하고 힘을 합쳐 집단적으로 대응하므로 '연대'가 된다.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이 너무 큰 이들은 '꽃뱀'에게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집단으로 성폭력 피해자를 공격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가해자 혹은 잠재적인 가해자인 남성들이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한 것은 이만큼 큰 해악을 가져온다.
김유정이 박녹주에게 죽이지 않겠다고 말하고, 인력거를 세워서 기껏 했던 말은 “너는 혹 내가 돈이 없는 학생이기 때문에 나를 피하는 거지?”였다. 자신을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피해자로 믿고 자조하면서도, 동시에 '가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그 힘을 발휘하는 것. 그것이 한국 남성들이 가진 모순이다.
"왜 안 만나줘" 시리즈 범죄는 한국 남성들의 잘못된 관계맺기, 관계에서의 문제 전가, 피해자로서의 정체성 구성 등 사회를 망치는 남성성의 비참한 모습이 총체적으로 담겨있다. 특히 '피해자 되기'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아주 널리 퍼져있고,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그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다.
남성사회엔 '균열'이 필요하다. 뻔한 말이겠지만 근본적으로 남성들의 '피해자 되기'를 막으려면, 보편을 원하거나 좇지 않고, 때문에 여성을 타자화하지도 않는 남성성 모델이 끊임없이 등장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최소한 자신이 누군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아는 남성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들이 피해자 행세하면서 여성들을 괴롭히는 그놈의 '남성연대'를 여성들을 도와 때려 부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