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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Mar 08. 2017

'82년생 김지영'씨에게 어느 남성이 쓰는 편지

김지영씨 안녕하세요. 저는 87년생 박정훈입니다. 당신의 동생과 나이가 같죠. 그리고 저 역시 오랜 시간동안 집안에서는 아무 일도 안 하고, '남자'라는 이유로 대접받고 살아왔습니다. 


저는 외아들입니다. 제 친구들 중에 외동딸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 외아들은 꽤 많습니다. 여아 낙태율이 높았던, 셋째 아이 성비가 3:1이 넘던 그때(1990년도 기준)의 남아선호사상은 '외동딸'을 사실상 금기시했으니까요. 생각해보면 제가 남자였기에, 김지영씨가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갖게 되었던 '내 방'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지게 된 거겠군요. 


김지영씨의 이야기를 찬찬히 읽었습니다. 대부분 다른 여성들에게도 들었던,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이야기라서 크게 놀라거나 인상에 남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다만 여성들의 삶을 졸졸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그 일상적인 '부조리'와 '불평등'의 크기가 얼마만큼인지 감히 남자로서 가늠해보게 됐습니다. 그리고 제가 살아온 삶을 김지영씨의 삶과 대비해서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학창시절, '남자 집단'의 모습은 이랬다  


당신은 남자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선생님께 불만을 제기해 자리를 바꿨습니다. 또 친구들과 함께 남자아이들이 먼저 급식을 먹는 것에 저항했었죠? 학교라는 공간에서부터 성차별이 시작된다는 걸, 당신은 그때부터 직감했을 겁니다. 


저는 남자 또래들과 잘 융화되지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당신을 괴롭히는 그런 남자애들처럼, 싸움도 잘하고 축구도 잘하는 인기 많은 아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저는 조용히 책을 보는 걸 좋아하는 뚱뚱한 아이였습니다. 놀림도 많이 받았죠. 군대 갈 때까지 느꼈지만, 또래들 사이에서 강한 남자 아이들은, 언제나 약하고, 자기들 기준으로 '남자답지 못한' 아이들을 억압합니다. 


그런데 '남자다운' 애들, 또래 중에 주류가 되는 남자아이들은 여성을 철저히 '대상화'시키며 으스대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겼습니다. 즉 여성을 남성에 의해 평가당하거나 정복당해야하는 객체로 여긴 것입니다. 


이를테면 중학교 시절 친구들은 지하철역에서 무리를 지어서 지나가는 여성들의 얼굴을 A, B, C... 이런 식으로 점수 매기곤 했습니다. 그들의 '얼굴 평가'를 들으며 저 역시 즐겁게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새로 부임한 교사의 치마 속을 핸드폰으로 찍는 반 친구들을 보며 놀라고, 한편으로는 경멸했지만, 그것을 딱히 말리지도 못한 채 묵인한 적이 있습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김지영씨를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스토킹한 한 남자 학생, 김지영씨 직장에서 몰카를 돌려본 남자 동료들, 그들 모두 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자들일 겁니다.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도 모르고 자라왔을테니까요. 


남성들은 인터넷을 통해 몰카 영상을 공유하고 있다. 끔찍한 현실이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음담패설'은 필수?  


대학교에 왔을 때는 김지영씨와 마찬가지로 남자인 저와 제 친구들은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종종 친구들은 자신의 여자친구 혹은 소문 속의 여성을 두고 성적인 이야기를 하기 일쑤였습니다. 물론 저 역시 친구들이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마다치 않고 함께 대화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러한 행동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김지영씨가 들은 '씹다버린 껌' 같은 이야기가 제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을까요? 또 그걸 누군가 들은 적도 한 번도 없을까요? 게다가 요즘에 '성희롱 단톡방'이 문제가 되는 걸 보면서, 그때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과연 저와 제 친구들이 떳떳할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가 없더군요. 


대학을 다니다가 중간에 휴학을 하고 군대를 다녀왔습니다. 군대라는 공간은 아시다시피 참으로 폭력적인 공간입니다. 저는 전경을 다녀왔는데, 제가 군대에 갔을 당시에는 물리적 폭력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지만, 여전히 온갖 가혹행위와 욕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선임들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줘야 할 때도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여자를 소개해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선임이 제 미니홈피를 뒤져서 친구 중 한 명을 지목하고, 저는 친구에게 전화를 건 뒤 마지못해 선임에게 수화기를 넘겨준 적도 있습니다. 아마 이런 상황에서 전화를 받아본 여성들이 꽤 많을 겁니다. 


군대에서는 음담패설이 난무했고, 휴가 나가서 성매매를 하고 왔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렸습니다. 심지어 휴가 중 성매매로 인해 성병에 걸린 것 같다며 투덜대는 후임도 있었는데, 더 충격적인 건 이 친구가 당시에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그 누구도 이 후임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나쁜놈", "더러운놈" 하면서 낄낄거렸을 뿐이죠. 


여성들의 좌절, 남성들의 '부당이익'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한 뒤에 취업 준비를 하게 됐습니다. 저는 꽤 오랜 시간 언론사 준비 스터디를 했고, 서른이 되기 전에 지금의 회사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이 스터디하던 친구들 중 남자들은 일찍 가고 늦게 가고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 이름있는 언론사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김지영씨처럼 대학 졸업 전에 취업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스터디를 같이하는 남자들과 비슷한 글쓰기 실력이나 스펙을 갖고도 매번 취업 문턱에서 좌절하기 일쑤였습니다. 다행히 기자나 PD가 된 친구도 있지만, 포기하고 다른 업종으로 방향을 돌린 여자들이 더 많습니다. 


언론사는 일반 기업에 비해 취업 시 성차별이 적은 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언론사 취업 카페에서는 공공연하게 차별받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필기 시험장, 면접 시험장에서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막상 최종합격자 명단에선 남성이 더 많거나 성비가 비슷한 상황이 다수의 언론사에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에게 가산점을 준다는 소문이나 일부러 1:1로 비율을 맞춰 뽑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닐 겁니다. 


그런데 여성들이 이렇게 어렵게 취업을 하는데도, 2014년 기준 대한민국 기혼 여성 다섯 명 중 한 명은 결혼, 임신, 출산, 어린 자녀의 육아와 교육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다고 합니다(책 145page 인용). 이쯤 되면 저를 포함한 남성들은 취업과 직장 생활 전반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부당 이익'을 챙기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김지영씨, 꼭 버텨내세요 


김지영씨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보며, 제 삶을 돌아보게 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저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결혼과 출산 이후에 겪은 큰 고통에 대해서는 실감하지 못합니다. 다만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는 당신의 이야기를 보며 깨닫는 바가 있습니다. 


결혼과 육아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속박하고, 그의 앞길을 막게 된다면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겁니다. 주제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돕는 게' 아니라 가사와 육아노동을 제가 더 많이 할 수 있을 때 아이를 키울 생각입니다. 너무 말만 그럴싸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김지영씨의 남편도 마음은 저와 비슷했을 겁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직장 일이 바쁘고 힘들었을 겁니다. 저도 나중에 가서는 '현실'을 탓하며 제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당신이 책을 통해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주변의 여성들을 한 번 더 둘러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에 있는 수많은 김지영씨들이 여성혐오와 성차별에 맞서 꼭 잘 버텨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끊임없는 '반성', 그리고 '연대'를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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