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남자의 삶은 다르다
어제 '소행성 책방'이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예민한 여자와 둔감한 남자가 함께 사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웹툰을 봤다.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내용이 좀 황당했다.
둔감한 남편이 치약을 밑에서부터 안 짜는 상황에 대해 예민하고 꼼꼼한 아내가 화를 내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한 발 물러서는 건 남편이지만 결국 둔감한 사람이 '속이 편할수밖에 없으니', 예민한 아내는 항상 의문의 1패를 당하는 기분이 든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한발짝만 물러서서 둔감한 마음으로 곁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자는 게 이 웹툰과 책을 연결시키는 교훈이다.
결론이 갑자기 '둔감하게 살자'로 나온것도 이상했지만, 애초에 그 결론을 내기 위한 웹툰의 설정부터 상당히 거슬렸다. 예민한 여자와 천하태평한 남자의 사이에서 참는 것은 역시 여자였다. 더불어 '상대적으로 예민한 여성'의 고충을 기껏해야 '치약 짜기' 정도의 문제로 국한시키는 것도 전형적이다. 치약 짜기? 그건 누가봐도 사소한 문제다. 매사 예민한 사람의 모습을 은근슬쩍 비판하기에 좋은 소재다. 보다 예민하고 눈치 빠른 여성의 문제제기를 고작해야 '치약을 밑에서부터 짜라'는 사소한 불만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이 담겨있다. 참고로 '예민하다'는 말은 '감각이 뛰어나고 빠르다'라는 뜻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어휘로 사용되고 있다.
분명 여성들도 둔감하게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대부분의 대중매체에서 여성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사람', 남성은 '둔감하고 속편한 사람'으로 형상화될까. 단순한 편견이 만들어낸 '상'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내가 겪은 집단에서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눈치가 빨랐고, 더 예민하고 날카로웠다. 또 자주 불안해했다. 내가 느긋하고 둔감한 사람이었기에 종종 주변 여성들의 모습은 '필요 이상으로 예민', '불필요한 것까지 신경쓰는'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서부터인가 내가 속 편하고 느긋하게, 큰 감정기복이나 불안 없이 살 수 있는 이유에는 '남성으로서의 특권'이 상당 부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유있고 비교적 주변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성격을 갖게 된것은 내 인격이 고양되서가 아니라, 그냥 운 좋게 자라왔기 때문이었다.
상당수의 한국 남자들이 '그렇게 둔감하게 자란다'는 것은 나의 일상과 성장 과정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먼저 나는 어릴 적부터 '가사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솔직히 말해서 82년생 김지영의 '동생'같은 존재다. 가사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집에서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들은 어릴 적부터 은근슬쩍 가사노동을 해야할것 같은 압박을 받았고, 실제로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되어서는 사실상 어머니의 가사노동에 상당 부분 동참한다. 그러나 남성들은 어떤 압박도 받지 않는다. 여성은 어리든 늙든 '잠재적 가사노동자'다. 반면 남성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부장 가족 사이에서 무언가를 치우고 정리하는 역할을 꾸준히 부여받으면서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여성들은 조금은 예민해지고 주변을 살피는 버릇을 익히게 되는 반면, 남성들은 지극히 무뎌진다.
감정적으로도 나는 남의 기분을 살피는 것을 잘 배우지 못했다. 누군가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었다. 이는 남자여서, 더해서 내 개인적인 상황에 기인한 것이다. 나는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부모의 비위조차 거의 맞출 필요가 없었다. 공부도 조금 잘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약간은 떠받들어지고, 남을 평가하는 위치에 자주 섰다. 반면 여성들은 남자 형제가 있는 경우에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강요받기도 하고, 남자 형제에 비해 관심을 못 받으면서 다른 사람의 감정에 맞춰나가는 것을 습득하게 된다.
지난 글에 이어서 김제동씨를 또다시 인용해서 미안하지만, 김제동씨가 예전에 "고백하고 거절하면 뒤돌아서 가면 됩니다"는 말의 사랑론을 설파한 적이 있다, 이건 진짜 웃기는 말이다. 그게 둔감한 남자가 하는 행동의 전형이다. 나는 학창시절에 세 번 정도 내 마음대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화이트데이 선물(사탕 등등)을 줬다.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에게 선물을 줄 건지도 몰랐다. 시그널을 전혀 보내지 않았다. 교감할줄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잘 보일 수 있는지 모르니까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이렇게 밑작업이 없는 고백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행위다. 잘 될 가능성도 없을뿐더러, 상대방은 괜히 미안함만 갖게 된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식'으로 감정을 밀어붙이는 식으로 관계를 맺으라고 조장하니, 남성들은 섬세해질 수가 없다. 그렇게 살다보면 둔감해지는 것이다.
또 어렸을 때 뚱뚱한 몸을 가졌음에도 비교적 외모에 대한 지적을 많이 받지 않았다. 간간히 놀림의 대상이 됐지만, 그것 때문에 구체적이고 증명할 수 있는 차별을 받은 적은 없었다. 지금도 살이 찌고 빠짐을 반복함에도, 살이 찐 상태의 나에게 지적하는 이는 그리 흔치 않다. 어른들은 항상 내게 "듬직하다" "남자가 그 정도는 돼야지"라고 말했다. 키카 크니 어느 정도 덩치가 있어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나와 비슷하게 키 크고 살찐 여성들이 한국사회에서 받는 대우에 대해선 굳이 말이 필요한가. 남자였기에 살이 쪄도 괜찮았고, "빼면 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 스스로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것과는 별개다. 남에게 불필요한 부분에서 평가받을 일이 비교적 적었다는 것은 나 개인의 행운이자, 대다수의 남성들이 누리는 행운이기도 하다. 대학생이나 취준생때까지만해도 나는 머리카락을 말리지 않고 밖에 나간 적이 많다. 이처럼 남의 눈치를 살피든 안 살피든 남자들은 주변으로부터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일상에서 거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만큼 언제나 안전한 상황에서 살아온 것도 둔감해지는 데 한 몫했다. 남자였기 때문이다. 예전에 나는 "그래도 한국은 치안이 좋은 편이지"라는 말을 종종 했다. 그것이 언제나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여성들에게는 얼마나 '속 편한' 말인지 뒤늦게 깨달았다.
느긋한 성격에 맞게 버스든 지하철이든 아무데서나 잘 자는 편이다. 택시를 탈 때는 의외로 아주 자버리진 않는데, 그래도 졸면서 간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데서나 잘 수 있는 것도 당연히 남자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졸고 있다가 누군가 내 허벅지를 만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다시는 대중교통에서 잘 수 없었을 것이다.
신변의 위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주변을 살피게 되고,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당연히 예민하게 살아야 한다. 누군가 따라오는 소리에 조금이라도 뛰어본 경험이 있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남성의 삶은 다를수밖에 없다.
여기에 남성들에게 '예민함'을 부정적인 감정처럼 생각하고, 감정적으로 무뎌져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도 있던 게 사실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또래남자집단 사이에서는 정말 많은 폭력적인 행위가 일어나는데,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볼멘소리를 하면 '바보'가 되기 일쑤였다.
분명 불편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무뎌져야 했던 지점이 있다.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심지어 몰카를 찍는 아이들이 있어도 그런 그들에게 한마디 하지 못하고 방조하기만 했다. 그런 부조리에 대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 또래남성들과의 관계도 악화될수밖에 없으므로, 그들이 저지르는 폭력이나 무례함에 대해서도 둔감해져야만 했다.
문제는 그렇게 여성이나 약자들에 대한 폭력들을 당연하다고 체화한 남성들이, 성인이 되어서 여성들에게 실제로 정신적 신체적 폭력을 저지르면서도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지도 모르고 산다. 문제제기가 있어도 '뭘 그런것까지 불편해하냐"며 괜히 시비건다는 식으로 받아들인다. '맨박스'는 존재한다. 그러나 '맨박스'가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하는 이상, 여성 대상 폭력에 대한 정상참작 요소가 될 순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느긋하고 여유롭다. 나는 페미니스트들을 인터뷰하고 여성단체 행사를 취재하지만, 안티 페미들이 나에게 메일이나 쪽지를 보내는 일은 드물다. 반면 여성 기자들은 페미니즘 관련 기사를 쓸 때마다 악성 댓글과 악성 메일을 받을 각오를 해야하고, 실제로 극심한 욕설 메일도 많이 받는다. 그래서 항상 그들에게 죄송하다.
블로그나 페북에 도를 지나친 댓글이 달리고, 지난번에 쓴 '집단적 자기연민'에 관한 글은 누군가 알싸에 퍼가서 내 프로필까지 올리며 공격한 것을 보긴 했다. 하지만 댓글에서 크게 반응은 없었다. 아마 나를 공격해봤자 별 재미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받는 비난은 여성들이 감수해야할 비난에 비해 그 빈도가 적고, 정도도 약하다.
한국에서 남성들은 과도하게 편하고, 눈치 안 봐도 되고, 여유롭고 느긋하게 생활할 수 있다. 남성들은 둔감해도 문제 없으니까, 오히려 둔감한 남성이 더 선호받으니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둔감한 남성들과 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은 과도하게 예민하게 살면서 불편하고 불안해 해야한다. 분명 누군가가 필요 이상으로 편안하면, 누군가는 필요 이상으로 희생해야 한다.
나를 비롯한 한국 남자들은 어디서든 예민하게 살아야 한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서열이 높은 남성들 앞을 제외하고는 너무나 눈치가 없어진다. 일상적인 공간에서도 주변 눈치를 많이 살피고, 감정 노동을 일부러 할 필요가 있다 (여성이 그 역할을 담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둔감하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남성중심사회에서 안락하게 살고 있는지 말해주는 증표일 뿐이다. 나아가 '너무 예민하다'고 느껴지는 지적들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대부분 당신이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 누구가 아닌, 나 자신이 '젠더 권력'이 주는 안락함을 당연한 듯 누려왔던 사람이다. 앞서 말했듯 언제나 나의 안정감과 여유가 '장점'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그것이 누군가의 희생 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닫게 됐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예민하고 불편하게 살려고 노력하겠다. 내적인 안락함을 깨는 것만이, 반성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일반화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성격적으로 예민하고 조급하고 눈치 많이 보는 남자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개인의 성격을 뛰어넘어서, 어떤 사회적 상황이 '예민한 여자, 둔감한 남자'라는 고정관념을 만들었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기서 '예민한 여자'는 여혐으로 가득찬 남성중심사회에서 버티기 위해 매사신경을 기울여야 했던 여자들의 모습을, 남자들이 조롱한 것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