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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Aug 26. 2018

뚱뚱해도 잘 사는 남자들, 살아남으려고 살 빼는 여자들

적어도 남자들은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여자들은...

1. 록산 게이의 에세이 <헝거>를 읽었다. 록산 게이는 어린 시절 겪은 고통스러운 일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물리치기 위해 마구 먹어서 몸을 키웠다. 그렇기에 '록산 게이'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살찐 몸에 대한, 살찐 몸을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주변 사람으로부터 '뚱뚱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라면 <헝거>의 몇몇 부분에서 무릎을 탁 칠 거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 이 안에서 나보다 살찐 사람이 누가 있는지 찾아봤는데 없을 때의 좌절감이랄지. '몸'이 이렇다는 이유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 때. 내가 너무 공간을 많이 차지하면서 누군가한테 불편함을 준다고 느낄 때 등등.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살찐(스스로에게 '뚱뚱하다'는 말을 붙이는 것은 왠지 가슴이 아프다) 아이였다. 9살때부터 20살때까지는 항상 살이 쪄있었고, 그 이후로는 찌고 빼고를 반복중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살이 찌면서 내 생활은 좀 꼬이기 시작했다. 체육을 못했고, 둔했고, 인기가 없었다. 괴롭힘도 당한적이 더러 있다. 언제나 '루저'같은 느낌으로 학교를 다녔다. 대체로 자신감이 없었다. 살이 쪘다는 이유로 무시받고 놀림을 받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 비극의 원인은 언제나 '살'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말이다.


20대 이후에는 다이어트를 하고 살이 찌고 빠지고를 반복하면서, 예전처럼 몸 때문에 위축되어선 살진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살이 쪘다"는 자각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매력없어 보이겠지', '사람들이 내 옆자리에 앉는걸 싫어할거야' 등등. 한창 살이 찐 요즘에는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심지어 어딘가에서 "돼지새끼가 여자들한테 인기 끌려고 페미니즘 글 쓴다"식으로 말하면 어쩌지, 라는 걱정도 된다.


물론 몸은 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나를 규정할 수 있는 가장 편하고 쉬운 기준이다. 그럼에도 남자라서 그런지 살에 대해서 남에게 크게 지적을 당해본적은 없다. 그런데 5년 전이었던가. 당시 취준생이었던 내가 한 지상파 방송 라디오 PD의 강의를 듣고 뒷풀이 자리에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술을 실컷 먹고 그 PD분이 내게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10kg만 빼고 면접 보면 될 것 같다." 


물론 그날 대체적으로 칭찬을 많이 들었고, 나름 생각해서 해준 말이라는 것 안다. 같은 남자라서 편하게 말한것도 있겠지.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그 말이 계속 생각나서 참 화가났다. 살이 아직도 내 인생의 발목을 붙잡고 절대 안놔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록산 게이의 <헝거>


2. 하지만 이후의 내 삶은 크게 불행하지 않았다. 특히 취준 과정에서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살 때문에 차별받은 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데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25kg가량 살을 빼는 다이어트를 하기도 했지만, 그 전후에도 내가 몸에 의해 평가절하되는 일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사회에 나가보니 나같은 몸을 가진 남자가 많았다. 배가 나오고 살이 찐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나는 '특수한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원한다면 나는 다이어트를 안 한채로 계속 살이 찐 채로 살아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낸 '2017년 비만백서'를 보면 남성 비만율은 35.7%, 여성은 19.5%다. 특히 30대 남자는 46%가 비만이다. 경도비만은 크게 살쪄보이진 않는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뚱뚱한 남자', '배나온 남자'는 상당히 보편적인 남성상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여성을 보자. 남성에 비해 비만율이 확연히 낮다. 그런데 정작 다이어트의 압박을 더 강하게 받고 있는 것은 여성이다. 섭식장애, 즉 다이어트가 원인이 되는 젊은 층의 거식증 또는 폭식증에 대한 통계만 봐도 이 압박의 정도를 보여준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2013년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섭식장애를 앓는 여성의 수는 남성보다 20대는 8.8배, 30대는 8.4배가 많았다.  


살은 남자들이 더 쪘는데, 다이어트에 대한 압박과 욕구는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상황이다. 왜 뚱뚱한 남성들은 (뚱뚱한 여성에 비해)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뚱뚱해도 괜찮기 때문이다. 적어도 남자들은 '몸'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드물다. 무엇보다 대상화되지 않으니까. 남성주류사회에서 '남성의 몸'은 일차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아니고 (사실 그래서 저 PD의 말이 잘 이해가 안 됐다) '능력'이 있다면 몸은 논외의 대상이 된다. 남자 정치인의, 기업인의, 예술가의 몸을 논한 적이 있는가? 살이 쪄도 떵떵거리는 사람들이 잘 사는 남자들이 너무나 많으므로 살이 쪄도 별 상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나쁘다는게 아니다. 왜 여성들은 저렇게 살 수 없는지가 문제일뿐.


우리 사회는 살이 적당히 찐 남성의 모습을 아주 편안하고 당연하게, 그리고 '주류'의 모습으로 받아들인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은 '과체중'으로 군면제도 받았다. 실제로 몸무게가 꽤 나가보인다. 하지만 이들을 누가 '뚱뚱하다'고 하는가. 물론 양복에 의해 몸매를 가리는것도 있겠지만 전부 이들을 '풍채가 좋은' 사람으로 언급한다. 문희상 국회의장도 젊은시절부터 살이 찐 체형이었지만, 그런걸 언급하는 사람이 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방송인 백종원이나 개그맨 김구라 등도 마찬가지.


앞서 언급한 2017년 비만백서는 이런 상황을 증명이라도 한듯한 결과를 내놓는다. 남성은 소득이 많을수록 뚱뚱하고, 여성은 소득이 낮을수록 뚱뚱했다.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22247640) 소득분위가 올라갈수록 남성은 비만율이 높아지는데, 여성은 비만율이 낮아진다. 거칠게 말하자면, 남성의 '비만'은 주류적인 질서에 속해있으며, 여성의 '비만'은 그 반대의 의미를 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남자들은 뚱뚱해도 괜찮다. 아니 뚱뚱해도 행복할 수 있다.



3. 물론 나의 경우를 비춰볼 때 뚱뚱한 남자가 마냥 행복한 건 아니다. 어리고 높은 지위를 가지지 않은 이상 사회적으로 받는 차별이 없을리가 없고, 사회적 미에 부합해 더 멋있어 보이고 싶어하는 욕구도 충족되지 못할테니까. 그러나 뚱뚱한 여자들이 겪는 현실에 비하면 한참 나은 편이다. 적어도 남자는 살 때문에 취업이 안 되거나 커리어가 막히는 일은 많지 않다.


여성들은 어린 시절부터 '뚱뚱해지면 네 가치가 떨어진다'는 생각을 주입받았다. 실제로도 살찐 여성은 남성들로부터 조롱받아왔고, 끊임없이 희화화의 대상이 됐다. 그가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능력을 갖고 있던간에 말이다.


명절때나 가족 행사때 친척들이 모이면 KBS1 아침마당을 봤는데, 그때마다 이금희 아나운서를 두고 "왜 이렇게 살 쪘냐"는 말을 하는 것을 몇 번이나 들었던 것 같다. 2005년도, 이금희가 퀴즈 프로그램의 단독진행자로 나설 당시 '자기 관리'가 부족하다고 비난하는 의견들이 시청자 게시판에 쇄도하기도 했다. 배 나온 아재들이 "쟤는 너무 살쪘다"며 혀를 차는 광경,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온다.


TV 드라마에서도 배 나온 남성은 사장님 역할을 했지만, 배 나온 여성은 하위계층의 역할을 했다. 이걸 보고 자란 여성들이 '살찌면 뭐 어때'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저체중에 가까운 사람들이 왜 입만 열면 '다이어트' 를 언급하겠는가.


최근 10대 여성들의 탈코르셋 플로우가 좀 과도하다는('탈코' 안하는 여성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지적도 나오지만, 이전에 그들에게 가해졌던 억압이 얼마만큼인지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작은 교복' 논란만 보더라도 몸에 대한 압박이 가해지는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살찐 여성은 아름답지 않다', '여성은 살찌면 가치가 떨어진다'는 사회적 강박이 초등학때부터 다이어트를 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기성세대가 만든 여성의 몸에 대한 억압을 해소해야 하는데, 이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살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게 "몸(외모)이 전부는 아니야" "다이어트 안 해도 괜찮은데 뭘" 이런 말들을 위로랍시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에게 별 도움이 안 된다. 정말 이 사회에서 뱃살이 있어도, 통통해도, 뚱뚱해도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살찐 여성들이 성공하고, 사회적으로 큰 명예를 얻고, 남자들처럼 몸을 제외한  '능력'으로만 판단받는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사회 곳곳에 사회가 규정하는 '날씬함'에서 벗어났음에도 멋있고 잘 나가는 여성들이 포진해 있어야하고, 롤모델이 되어줘야 한다. 이들이 네 몸이 네 가치를 판단하는 전부가 아니라고, 네 몸이 네 앞길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해주는 산 증인이 되어야 한다. 물론, 아예 여성이라는 성별을 배제하는 지독한 유리천장부터 깨어나가면서 시작할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 <밥블레스유>에 수영복을 입고 나온 이영자의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이 위안을 얻었으리라 믿는다. 한 시대를 지배하던 톱 코미디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이 쪘다는 이유로 놀림의 대상이 되고, '다이어트 광고 파문'으로 고난을 겪어야 했던 이영자였다. 그가 다시 전성기를 맞고, 광고도 찍고, 옛날처럼 '살'을 주제로 웃기지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쁘다. 이영자는 자신의 수영복 촬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얼마 전에 제가 수영복 사진 때문에 인터넷에 올랐었는데, 사람들은 저한테 얘기를 해요. ‘되게 당당하다’고. 근데 그거 아니거든요, 사실. 나도 그렇죠. 내가 어디 가서, 무척 괜찮은 몸매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도 사회가 갖고 있는 인식과, 나의 자존감과 싸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버텨보려고 벗은 거야. 내 몸이니까."


이영자처럼 자신을 '살찐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가둘수 없다는 성공한 여성들의 '싸움'이 더 많이, 끊임없이 우리 앞에 드러나야 한다. 이를 위한 전제는 남성들이 여성들의 자리를 부당하게 차지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4. 사람은 자기 힘든 게 가장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이 글을 보면 아마 나와 같이 '살찐 남자'들이 '나도 힘들다'며 고통을 호소할지 모른다.


그러나 통계, 사회적 현상, 주변에서의 증언 등 모든 것이 비슷하게 살이 쪘을 경우 여성이 훨씬 더 심각한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남성적 시선'은 곧 우리 사회의 시선이기에, 여성의 몸은 남성이 보기에 아름다워야, 혹은 거슬리지 않아야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 제멋대로 여성=몸으로 상정하고 숭배하고, 또 비난한다. 여성은 이 체제에서 최소한 비난은 받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살찐 사람들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여기며 당당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것은 꿈 같은 일이다.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살찐 여성들이 나만큼만, 살찐 남성들만큼만 힘들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실컷 고기를 먹고 벨트를 풀어 자신의 배를 탕탕 두드기기도 하고, "야 살 좀 찔 수 있지"라고 편하게 말하고, 회사에서 내 몸에 아무도 관심이 없는듯한 느낌을 받으며 살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면서도 매일 다이어트를 생각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스트레스 받기를 반복할 것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너무 살쪄보이면 어떡하지'를 가장 먼저 고민할지도 모른다. 이성에게 매력이 없어보일까봐 우울해질 수도 있다. 그래도 딱 그정도만, 그 정도만 힘들었으면 좋겠다.


*'뚱뚱해도 잘 사는 남자들'이라는 제목은, 이들이 평균체형인 남자들보다 잘 사는게 아니라, 적어도 비슷한 수준으로 살찐 여성들보다는 잘 산다는 의미로 지었다.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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