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훈 Sep 03. 2018

'자뻑'에 빠져있는 남자들

자기객관화가 안 되면 '위력'으로 남에게 피해를 준다

"그래서 내가 자상하고 좋은 boss"

'안희정 1심 판결문'에 인용된 텔레그램 내용 중 가장 나를 아연실색하게 한 안희정씨의 말이다. 비록 뒤에 '자뻑'이라고 부연하긴 했지만, 보통의 사람이 부하 직원에게 스스로를 '자상하고 좋은 boss'라고 말하는것도 부끄러운 일일 터. 게다가 이 메시지는 이미 수차례 성폭행과 성추행 혐의의 사건이 일어난 후인 11월에 보낸 것이다. 결국엔 '미투'로 고발당할까봐 걱정하던 상급자의 말이라기엔,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이렇듯 '위력'은 위력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나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들은 자신들이 폭력이나 폭언을 사용하지 않고, 적당히 다정하고 덜 권위적으로 굴면 위력이 없다고, 행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안희정 1심 재판부의 생각이기도 하다.

위력을 '사람의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유·무형의 힘'이라고 정의한다면, 위력은 그 힘의 적극적인 사용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 자리와 사회적, 경제적 위치 그 자체가 위력이다. 위력을 가진 이들은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압박을 할 필요가 없다. 말 그대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다. 거부하고 싶어도 엄청난 불이익이 따를 거라는 불안감과 공포가 일어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그게 위력이다.

위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위력을 망각한다. 자신의 행동을 막지 않거나, 요청을 거부하지 않는 이유를 '내가 정당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안희정씨처럼 굉장히 큰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만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위력은 곳곳에, 아주 사소한 형태로 있다.

예전에 내가 활동한 독립언론 <고함20>에서 면접관을 했을 때의 일이다. 두 명의 면접을 봤는데, 그중 한 명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나 자소서가 너무 엉망이라서 좀 짜증이 났다. 그때 나는 우습게도 '악역 면접관'의 역할에 도취되어 있던 상태였다. 슬그머니 인쇄된 그 면접자의 자소서를 4등분으로 접어서 볼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뒤로 빼놓았다.

그 장면을 해당 면접자가 봤을지 안 봤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무례하다고 항의받고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손하게 면접을 마치고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다. 당시 나는 마치 무례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행동했고, 그는 그 무례한 행동에 대응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고작해야 청년 독립매체의 전직 편집장이었을 뿐이었고, 면접자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그가 이곳에 들어올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선 결정할 수 있었다. 그에게 위력으로써 눈치를 보게 하고, 무례함에 대응하기 어렵게 만든 것이 확실하다. 부끄러운 기억이다.
 
직장을 다니고 여러 사람을 만나다보면 '우리는 동등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격의없이 말하는 사이 같아도, 더 권한이 크고 상대방을 압박할 수단이 더 많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위력을 갖는다. 내가 동등해지고 싶다고 동등해질 수 있는게 아니다. 자신은 그저 동료, 동지, 파트너라고 생각하겠지만 타인은 꾸역꾸역 맞춰주는 것일 수도 있다.

위력이 내 의도와 관계 없이 생길 수밖에 없다면 "편하게 대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상책이 아니다. 그냥 위력을 악용해서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 부하 직원이나 상대적으로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이 최악을 면하는 법이다. 나중에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라고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과거 당신이 상급자에게 당했던 막말과 저질 농담들, 부당한 요구 등도 대부분 "그럴 의도가 아니었을"테니까.

안희정씨의 경우처럼 자기객관화에 실패한 경우에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구분이 안 되기도 한다. 아마 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큰 반발을 받아본 적은 없을 것이다. 잘해야 얼핏 수평적으로 보이는 내부 논의 등을 거쳐서 결국은 '뜻대로 하옵소서'식으로 일이 진행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 자체가 나쁘다는게 아니다. 다만 도청이나 캠프 직원들이 그의 말에 따르는 것은 그가 언제나 옳은 말을 해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어야 했다.

안희정씨뿐만이 아니다. 알량한 권력을 가지고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면서도, 반발이 없으니 '그래도 되는 것인양' 여기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당신이 갖고 있는 위력에 아무말을 못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기객관화에 실패한 경우다. 이런 사람들은 누가 지적해도 잘 달라지지 않는다. '정당화'를 하기 때문이다.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른다. 저질농담은 "분위기 좋게 하기 위해서", 후배들을 공격하면서도 "회사 잘 되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누군가 위력의 작동에 개입했음에도, 자기 객관화에는 실패하는 것이다.

물론 '위력의 악용'은 개인 품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 전반의 인권의식이나, 차별에 대한 민감도에 따라서 위력을 가진 이에게 '용인되는 행위'의 범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인권이 남성에 비해서 현저히 낮은 사회는 여성을 향한 '위력의 악용'이 많아진다. 성폭력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특히 강요되는 애교, 분위기메이커 역할, '꽃'의 역할 등등을 묵묵히 수행할수밖에 없을때도 있다. 어디 그뿐일까. 워킹맘들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 표출에도 웃어야하고, 명백한 임금성차별과 유리천장 앞에서도 '내 능력이 없겠거니' 해야 한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위력은 더욱 강력하고, 다양할 수밖에 없다.

같은 조건이면 한국 사회에서는 대체로 나이가 많고, 남성인 이가 더욱 많은 힘을 가지게 된다. 대부분의 조직이나 모임에서 '누가' 자신의 위력이 어느정도인지 가늠하고 경계해야 하는지는 명백하다. 그런데 '위력의 행사가 없으니 무죄다'에 동의하는 남자들은, 자신이 사회에서 갖고 있는 위력이 어느정도인지 알지 못할것 같아 걱정이 된다. 제발 누군가가 용기있게 한마디 했을때, 잘못을 인정하길 바랄 뿐이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큰 고통을 주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자뻑에 빠져있는 수많은 '안희정들'중에 한 명이 되기 싫다면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