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훈 May 19. 2020

'불편한' 경비노동자, 정말 원하십니까?

갑질에 분노한다면, '당당하고 힘 있는' 경비원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경비노동자 갑질'의 대명사다. 2014년 2월에 신현대아파트에서 벌어진 경비노동자 분신 사건은 지금의 '강북구 아파트 경비노동자 사망 사고'와 비슷하다. 평소 갑질을 일삼던 노인이 경비노동자에게 "이거나 먹으라"면서 빵을 던졌고, 모욕을 참지 못한 경비노동자가 차 안에서 분신을 해서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그 이후 경비노동자들은 갑질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는 '보복'으로 돌아왔다. 구현대아파트 경비노동자들은 휴게시간 6시간을 보장받지 못한것에 대해 노동청에 '체불 임금 진정'을 냈다. (훗날 소송까지 했으나 사실상 패소했다). 그러자 입주자대표회의에선 2018년 '최저임금 인상'을 핑계로 경비노동자 93명을 전부 해고하고, 직접고용에서 용역업체를 거치는 간접고용으로 전환했다. 해고를 막기 위해 경비노동자들은 '발렛 파킹'을 거부하는 준법 투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훗날 중노위와 법원은 이를 '부당 해고'라고 규정했으나, 이들이 복직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주차난이 심각한 지역이라서 경비노동자들에게 보조키를 맡기고 수시로 발렛파킹을 시키는 곳이다. 업무의 3분의 2가 발렛파킹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그럼에도 수십년동안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새벽 2~3시에도 발렛파킹을 시키는 등 '사람을 갈아넣으면서' 아파트를 유지했다. 내가 만나본 현대아파트 경비노동자 한 분은 "새벽에 클락션을 빵빵거리며 반말로 "차 빼"라고 하는 모습에 너무 분통이 터진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제 그 말도 안되는 시스템에 저항을 하려고 하니, 바로 '해고'를 해버렸다. '부리기 쉬운', '말 잘듣는', '피곤한 노조같은 게 없는' 이들을 쓰면서 계속 노동착취적 시스템을 유지하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다른 아파트들도 경비노동자에 대한 처우는 크게 다르진 않다. 90% 이상의 아파트 경비노동자들은 용역회사나 위탁관리업체 소속으로 간접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매우 불안정한 처지에서 일하고 있다. (서울시 경비노동자 실태보고서 인용) 언제든 잘릴 수 있고, 갑질에 대항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은 어디나 매한가지다.

만약 강북구에서 돌아가신 경비노동자에게 노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그가 한 명의 '노동자'로, 사측이라고 할 수 있는 '입주자'와 협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대항해서 성공해본 기억이 있고, 부당함을 극복해낼 구조적 탈출구가 보이는 위치였다면 그는 결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무기도 없었다.


어느 동네나 '악인'이 산다. 악인이 없고 모두가 선량할리가 없으니, 악인의 존재는 '상수'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지역 사회의 과제는 그를 어떻게 통제할 것이냐에 달려있다. 경비노동자의 업무 중 하나는 그러한 악인이 동네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약자를 괴롭히는 것을 제재하고 관리하는 데 있다. 그런데 정작 경비노동자가 악인으로부터 '갑질'을 당하면, 대체 누가 도움을 줄 수 있는가. 경비노동자가 입주자를 경찰에 신고할 수 있는가? 경비노동자가 입주자대표에게 공문을 보내 항의할 수 있는가? 


상황이 이러니 다른 곳에서 강북구 아파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도 막을 방법이 없고, 비슷한 사례는 재발할수밖에 없다. 아니, 지금도 수많은 곳에서 경비노동자를 향한 '갑질'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악인에게 분노를 표하는 것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악인을 제재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일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시민들이 '당당한 경비노동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지 모르겠다. 정확히 말하면 경비노동자들이 노동3권을 제대로 가지는데 심리적 거부감이 있거나, 관심이 없어보인다. 입주자에게 '바른 말'을 할 수 있고, 부당한 노동환경을 개선해달라고 말하는, 내년에는 월급을 대폭 올려달라고 말하는, '협상하는' 경비노동자를 우리는 원하는가? 입주자들이 그런 노동주체들을 감당할 수 있는가? 아마 대부분의 주민들은 협상을 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고, 불편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편안하게 용역회사에 맡기고, 그 조건마저 마음에 안들면 더 좋은 조건을 내세우는 용역회사와 계약을 맺고 사실상 경비노동자들을 새로 뽑아 버린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지난해에 경비 용역회사를 바꾸고, 비용을 절감했다면서 자랑스럽게 공지를 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 공지글을 보고 잠시 마음이 안좋았다가 결과적으로는 무관심하게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대부분의 주민들이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공지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은연중에 알게 된다. "경비노동자는 최대한 싸게 쓰면 좋겠구나", "마음에 안들면 용역회사를 바꿔버리면 되는구나" 아파트 주민들은 그럴 힘도, 권리도 있다는 사실이 아주 자연스럽게 주민들의 머릿속에 박히는 것이다. 


입주자가 경비노동자의 절대적인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게 당연시되는 상황에서 경비노동자는 계속해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대항할 수 없고, 보호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게 뻔히 보이면, 악인들의 표적이 될수밖에 없다. 아무리 선량한 사람들이 노력해도, 경비노동자가 진정 '노동자'로 인정받지 않는 구조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강북구 아파트 경비노동자 죽음에 분노하는 움직임은, 경비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고 그들이 '갑질'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주민들에게 화를 낼 수 있고, 파업으로 아파트를 뒤집어놓을 수 있는, '힘 있는' 경비노동자를 원하는 사회에서만 더 이상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코로나 시대의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