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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Feb 25. 2020

코로나 시대의 사랑

우리는 공포에 '함께' 맞서야 한다

권여선의 <손톱>에 나오는 주인공은 한 달에 170만 원을 버는 쇼핑몰 판매원이다. 도망친 언니가 남기고 간 1000만 원의 빚과 옥탑방 보증금으로 빌린 5백만 원을 안고 화수목은 열 시간, 금토일은 열세 시간을 일한다. 빚을 조금씩 갚으며, 이것저것 제하다 보면 자기 손에 들어오는 금액은 18만 원이 전부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증금 1억원 집에 살기 위한 계획을 깨지 않는다.


소희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은 '뒤집힌 손톱'이다 박스를 들다가 굵은 고정쇠가 손톱을 뚫고 갔고, 결국 그는 '냉동 치료'라는 것을 받아야 했다. 치료 금액은 무려 7만원. 심지어 병원 측에서는 대여섯번은 더 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내가 뭘?뭘?뭘?"이라고 작게 소리치며 다시는 병원에 안 오겠다고 다짐한다.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불편'이 될 작은 상처가, 누군가에게는 삶의 기반을 뒤흔들만한 일이 된다. '계층'은 불운을 맞이했을 때 그 모습을 불쑥 드러낸다. 불운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구분될 때 우리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걸 실감한다.


켄 로치의 <미안해요, 리키>는 현 시대의 노동자들이 '안전망' 없이 사소한 불운에 무너질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일러준다. 아들이 일탈을 일삼고, 강도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두 가지 사건만으로 리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당신의 불운은, 당신의 문제일 뿐입니다'라는 사회 앞에 일개 노동자는 대항할 방법이 없다.


최근 코로나19는 언제든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불운'으로서 사람들을 공포에 빠지게 만들고 있다. 특히 코로나와 엮이는 순간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는, 약자일수록 공포가 크게 느껴질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삶에 우연히 닥친, ‘재수없는 일’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손톱>의 소희나, <미안해요, 리키>의 리키가 코로나 확진자거나, 코로나 확진자와 접촉해 자가격리 됐다면, 과연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될까. 


실제로도 코로나19는 영세자영업자, 비정규직 노동자, 프리랜서 등의 삶을 가장 불안하게 하는 요소다. 심지어 이들이 확진자거나 자가격리 대상이 된다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분명히 모두에게 큰 아픔 내지는 불편함을 안기겠지만, 가장 불안정한 계층에게 가장 큰 피해를 안길 것은 분명해보인다. 일자리를 잃는 등 수입원이 한 순간에 사라질 것도 각오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코로나는 '지옥'처럼 여겨질수밖에 없다.


나아가 코로나19가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나의 '불운'이 동시에 '타인의 불운'이 될 수 있어서다. 그리고 그 타인의 불운은 예측할 수도 없다. 코로나19가 무섭다는 이들의 상당수가 갖고 있는 생각일 것이다. 자신이 피해 보는데서 끝나지 않으므로, 불특정 다수를 곤경에 처하게 하면서 '낙인 찍힐'것에 섬뜩함마저 느낀다. 이중의 공포다.


그런데 내 의문은 이런 공포가 어째서 완화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증폭되는 방향으로 가냐는 것이다. 코로나19에 감염된 환자는 지원받고, 보살핌을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만으로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고 있다. 정부의 적극적이고 투명한 방역 조치가, 황당하게도 한 사람을 '혐오'의 대상으로 규정짓는데 이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론을 만드는 언론사들은 경각심을 넘어 공포심을 자극하는 보도를 관습적으로 혹은 조회수를 위해서 일삼는다. 한 명의 확진자가 나온 것을 '뚫렸다'면서 지역 전체가 위험에 빠진듯 말하고, 한 도시를 '유령 도시'로 표현한다거나 정부의 대처를 깎아내리며 불안감을 고조시킨다. 


지라시나 가짜뉴스는 더욱 해악이 크다. 어떤 사람이 '자가격리' 하는것까지 알려주는 지라시도 받아봤는데, 만약 내가 확진자라면 대체 어떤 지라시가 돌지 짐작조차 어려웠다. 확진자 신상을 공개한다거나, 어느곳에 의심환자가 있다는 가짜뉴스도 봤다. 이런 것들은 사태의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아프거나 감염이 의심되도 참고 넘어가야 한다는 시그널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다.


지금과 같이 여론의 공포가 증폭된 상황에서는 확진자는 대부분 '가해자' 취급을 받는다. 이러니 '감염이 돼도 내 삶이 흔들리지 않겠구나'라는 믿음이 생길수가 없다. 감염이 되어도 국가가 온전히 치료를 해주고, 경제적 손해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하는데, 감염이 되면 '끝장'난다는 인식만 팽배해지고 있다. 경각심을 갖는 것을 넘어서, 온 사회가 불안에 떨고 위축될 수밖에 없다. 


물론 코로나19를 잡기 위한 강력한 정부의 조치, 자발적 예방을 강조하는 시민의식은 중요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의 불운은 사회가 책임져줄게'라는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다. 감염자들은 '기피' 대상이 됐을뿐, 격려받거나 '쾌유'를 바라는 응원의 대상이 된 적이 없지 않은가. 그들이 바이러스에 의해 고통을 보고, 함께 싸우는 이들로 호명되어야만 공포가 사그라들 수 있다.


언제까지 자기자신이 '혐오'의 대상이 될까봐 두려워하며 살 수는 없다. 코로나 시대에도 사람들은 만나야 하고, 사랑을 주고받아야 한다. 절대 각자도생으로 버티게 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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