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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Sep 15. 2020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신한 남페미'가 아니라

선 긋기와 속죄를 넘어서


내가 쓴 책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의 남성 구매 비율은 22.5%(알라딘 기준)다. 남성들이 많이 봐줬으면 하는 생각으로 만든 책이지만, 여느 페미니즘 책처럼 남성 구매비율은 낮다. 현실을 생각하면 20%가 넘은 것만해도 다행이다 싶다가도, 역시 아직까지는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은 '남의 일'이 아닌가 싶어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종종 시민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거나 좌담회를 여는 경우가 있다. 최근 대면 2번, 비대면 2번으로 대중강의를 진행했는데 남성은 없거나, 1~2명 정도 참여하는 정도였다. 지난 8월에 강연을 주최한 한 선생님이 "굳이 듣지 않아도 되는 분들이 듣고, 정작 꼭 들어야 하는 남자들이 안 듣는다"고 말하신 게 정말 마음에 와닿았다. 그만큼 남성들은 자신을 페미니즘을 실천해야하는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남성들조차도 여성들만큼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선 긋기' 통해 페미니즘과 거리 두는 남성들


남성들이 '이중의 선 긋기'를 통해 페미니즘의 실천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젊은 남성들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나는 아니야'로 일관한다. 성폭력과 성차별이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맞지만, 자신에게 책임은 없다는 것이다. n번방 가해자들에 대한 엄벌을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불법촬영 구조를 만든 것은 당신들이다'라는 말에는 펄펄 뛴다. 그저 개인적으로 선량하게,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고만 생각한다.


물론 누구에게나 범죄나 비도덕적 행위와 되도록 자신을 결부시키지 않고 싶고, 언제까지나 '선량한 피해자'로 있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이뤄지는 폭력에 은연중에 가담하거나 방조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라는 요구조차, 번번이 "나를 왜 가해자로 만드냐"는 결벽증적인 반응에 막히기 일쑤였다. 때문에 남성들은 '하면 안 되는 일' 이 무엇인지만 배웠을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나는 아니야'라는 선을 넘더라도, '페미니즘은 여성의 몫'이라는 선을 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겠고, 페미니즘을 말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별다른 불만도없다. 하지만 이를 위해 "남자가 뭘 할 수 있냐"고 묻는다. 남자가 페미니즘 운동을 지지해야 할 의미도, 이유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페미니즘을 단순히 '여성을 위한 운동', '여성의 몫을 키우기 위한 운동'처럼 여겨서다. 여성을 비롯한 타인과의 '관계맺기'에서 대안적 관점을 제공해주며, 자신의 위치를 조망하며 변화와 해방을 도모하는 근거로 삼을 수 있고, 남성중심사회의 부조리와 폭력을 해소하는 운동이자 이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남성 정치인 혹은 유명인들이 성폭력 문제에 대해 내는 목소리가 그저 허울좋게 들리는 이유는 그들이 결코 젠더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되려고 하지 않아서다. 구체적이고 복잡한 문제는 전부 여성들에게 떠넘긴다. 언론사에서 젠더 기사는 대부분 여성 기자들이 쓰는 상황만 보더라도, 많은 남성들은 여전히 '젠더 문제'를 자신이 고민해야 할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조신함'은 답이 아니다


선 긋기를 거부하고 페미니즘의 주체가 되기로 한 일부 남성들이 있지만, 이들 역시 적극적으로 목소리 내는 것을 어려워하는 경우가 있다. 가부장제의 특혜를 누려왔고, 지금도 여전히 남성이라서 이득을 누린다는 깨달음을 얻으면서, 자신이 페미니즘을 '감히' 쉽게 말할 수 없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운영진인 이한씨는 보고서 <남성 페미니스트를 찾아서>를 통해,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자신이 누리던 젠더권력을 내려놓기 위해 다양하게 시도한다. 발화권력을 줄이는 것도 그 시도중 하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을 알아가면서 느끼는 성별격차와 이로 인한 죄책감은, 발화권력을 인지하고 신경쓰는 데서 그치지 않고, 활동 자체를 위축되게 만든다고 이 보고서는 지적한다.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하고 남성에 비해 피해 당사자의 위치에 가까운 여성 페미니스트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르며 조력하는 위치에 멈춰 서기도 한다" (남성 페미니스트를 찾아서 62p)


이는 흔히 '속죄 페미니즘'이라고 일컬어진다. 이씨는 보고서에서 "성별 이분법에 근거해 여성을 타자화/대상화 하며, 활동과 사유를 한계 짓는다"라며 속죄 페미니즘을 비판했고, 나 역시 페미니즘이 남성에게 '나의 올바름'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만 기능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속죄 페미니즘'을 비판하기 이전에 현재 페미니즘을 실천하고자 하는 남성들이 빠질 수 있는 필연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는 과정이 '속죄'인 것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대부분의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둘러싼 구조를 조망하고, 그 안에서 남성으로 살아왔던 삶을 성찰적으로 바라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과정은 수없는, 또 끊임없는 반성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남성의 특권(발화권력)과 '맨스플레인'에 대한 지적이 수없이 나오고, '조신함'을 남성 페미니스트의 가장 큰 덕목으로 이야기하는 현재의 분위기에서 '속죄 페미니즘'이란 함정이자, 유혹이다. '남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진정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일단 '남성이라서 미안합니다'가 안전한 방식의 발화이기 때문이다. 내 과거 글에 유독 '나의 반성'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여전히 반성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고 믿는다. 또한 어떠한 성찰 없이 '입으로만' 페미니즘을 이야기했던 기성세대 남성들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쉽게 말하면 안 된다'는 강박을 갖는 것이 나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성이 오로지 '조신함'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여성에게는 '조신함'이 명백한 억압이지만, 남성에게는 '조신함'이 자칫하면 방관이나 책임을 피하는 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누군가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사람이 타인을 설득시킬 수는 없다. '나쁘거나' '부족한' 남성에 대한 비판이 페미니즘 실천의 전부가 될 경우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남성에게 '페미니즘적 말하기'란 '보편'의 자리에서 물러나서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명확하게 밝힌 다음에 말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나의 위치를 만든 토대를 설명하고, 그 토대가 왜 부정의하고 잘못됐는지 설명하며 '전지적 관점'을 내려놓는 것이 시작이다. 나아가 무엇을 변화시키고 싶고, 이를 위해 내가 갖고 있는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진정한 남페미'는 없다


나는 선을 긋는 이들이나,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도 아직 스스로 운동 주체로 나서지 못하는 이들 모두에게서 가능성을 본다. '나는 아니야'라는 정서에는 적어도 무엇이 잘못됐는지에 대한 인식이 있고, 이는 그들이 페미니즘 리부트의 영향권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나고 수직적 시스템이 완화되면서 호모소셜의 유대감이 예전같지는 않다. 빈틈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실한 분석이 필요한 시기다.


하물며 페미니스트로서 정체화하는 남성들이 '속죄'에 빠져있다고 비난만 할 일은 아니다. 현재 한국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남성 상당수의 발화에는 '속죄적 요소'가 있다. 게다가 누구도 속죄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 '새로운 남성성'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단순하게 정답을 내리기 힘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성들조차도 다른 남성들에게 몇 가지 관문을 놓고, '이걸 통과 못하면 너는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야'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는지 되물어야 한다.


한때 나도 '남성 페미니스트의 진정한 자세'를 이야기하며 남을 다그치려고 하던 적이 많았다. '조롱하면 안 된다' , '위치성을 망각해도 안 된다' 등등의 내 나름의 기준이 있었고 이 부분을 지키지 않는 이들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남성이 보면 좋을 책, 들어야 될 강의에 정작 남성의 자리가 없는 상황을 보면서, 내가 어쩌면 선을 하나 더 늘리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게 됐다.


남성들도 '성별이원제의 젠더매트릭스를 깨자는 더 급진적인 페미니즘'(손희정, '형제여 어디로 갈것인가' 인용)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 적극 동의한다. 그러나 홀로 급진적일 수는 없다. 함께 이마를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는 더 많은 동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수많은 선 긋기와 맞서려고 한다. 우리 사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누가 '제대로 된 남페미'가 될 수 있느냐 따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길이 맞다는 것을, 그리고 옆에 있는 당신의 친구도 그 길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설득하는 것이 우선이다.


한 명의 무결점 남성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결점이 많더라도 고민하는 수많은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필요하다. 가부장제에 저항하고, 남성연대를 무력화하는 주체가 되기 위한 전망을 함께 고민해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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