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 대체 언제까지 '누나'라고 불려야 하나?
어제 KBS2에서 방송된 '나훈아 콘서트'의 말미, 나훈아는 어려울 때 나라를 지킨 것은 평범한 국민들이었다며 코로나19로 인한 위기를 겪고 있는 이들을 위로했다. 그러면서 "유관순 누나, 진주의 논개, 윤봉길 의사, 안중근 열사 뭐 이런분들 모두 다 보통 우리 국민이었습니다"라며 위인들을 언급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KBS의 자막이 특이했다. 유관순은 그대로 '누나'로 기재하되, 안중근은 '의사'로 고쳐서 자막을 단 것이다. 맨몸으로 저항한 경우에 '열사', 무력으로 항거한 경우에 '의사'이므로, 안중근은 '의사'라고 하는게 정확하다. 그런데 왜 유관순은 '열사'로 바꾸지 않았을까? 차라리 말을 그대로 옮긴 경우엔 문제가 없다. 그런데 한 쪽은 공식 호칭으로 바꾸고, 한 쪽은 그렇지 않다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가수 개인은 '누나'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60~70대는 학교에서부터 '유관순 누나'로 교육을 받아왔을테니까. 그러나 공영방송사는 올바른 호칭 표기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안중근은 의사라고 고치면서 유관순은 누나로 남겨뒀다는 점, 단순히 '부주의'가 원인은 아닐 것이다.
유관순 열사가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비교적 눈에 띄었던 점은 '어린 여성'이라는, 그의 성별과 나이다. 그 때문에 이승만 정부를 통해 3.1운동의 상징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유관순열사는 '민족의 누이', '독립운동의 꽃'이라는 성별화된 존재가 됐으며, "'곱고 여린' 여학생을 일제가 참혹하게 고문해서 죽였다"는 식의 희생자 서사가 더 강조되기도 했다.
'누나'라는 호칭이 이어져왔다는 사실은 그가 온전한 역사의 주체로서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한다. '누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가족(가부장제) 안에서의 남성이 그를 관계 속에서 호명할때만 가능해진다. 이렇게 그는 남성의 시선에서 '영웅'이 아닌 '여성'으로서, 또 '사적인' 존재로 대상화됐다. 남성으로 표상되는 국가와 가족이 그를 독립운동가라고 불러주는 대신, '소녀'로 포박한 것이다.
어떤 남자 위인이나 독립운동가에도 '형'이라는 말은 붙지 않는다. 윤봉길 의사도 사망 당시 겨우 25살이었지만, 아무도 '윤봉길 형', '윤봉길 오빠'라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 규정지어질 필요가 없는, '보편형의 인간'인 남성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여성 독립운동가'로서의 유관순 열사의 업적을 조명하기 위한 작업이 이어지고 있지만, 오랜 시간 그를 '누나'로 부르게 했던 흔적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듯 하다. 최근 유관순 열사의 얼굴을 '페이스 앱'으로 보정해서 '웃는 유관순'을 만들어 논란이 되었던 일은, 한국 사회가 유관순 열사을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가련한 어린 여성'으로 도구화하는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실감케했다.
클리앙의 한 유저는 9월 29일 <유관순 열사 사진을 조금 더 복원해 봅니다>라는 글을 통해 , 수형기록표에 있는 유관순 열사 사진을 고쳐서 게시했다. 엄밀히 말하면 '복원'이 아니라 '보정'이었다. 얼굴 선을 갸름하게 만든 사진 한 장과 웃는 모습으로 만든 사진 한 장을 올렸고 이는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이 사진을 격찬하는 반응 속에서 유관순 열사조차 '어린 여성'이자 '미적 대상'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실감한다. "저 예쁜나이에", "누님 예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굴러가는 낙엽에도 웃고, 꽃마저 질투하던 시절이지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복구하셨네요"등등.
위인이 왜 예뻐야 하나? 위인이 왜 웃어야 하나? 독립운동가의 외양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서 심지어 가상으로 웃게 만든 이유는, 유관순 열사를 '꽃처럼 아름답고', '밝아야 마땅할' 어린 여성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사진을 보정한 사람이나 댓글을 단 사람들 누구도 '대상화'의 의도는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단호하고 강인한 모습을 보인 독립 투사를 왜 '고운 얼굴로 웃음 짓는' 모습으로 기억해야 하는지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남성중심 사회가 바라는 '여성성'을 위인에게까지 투여한 것에 불과한데, 여태껏 그런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사회였으니 별 문제의식을 못 느낀채 '감동했다'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참고로 고문을 당하기 전 유관순의 모습은, 이화여대 측에서 이화학당 재학 당시 사진 두 점을 공개하면서 알려진 바 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의 이야기 또한 한국에서 '러블리한'이라는 수식이 붙은 채로 홍보된 적이 있다. CGV가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인 <세상을 바꾼 변호인>의 한국판 포스터의 문구를 영문판과는 딴판으로 썼기 때문이다. 'Heroic'(영웅적인)은 '러블리한 날'로, '펠리시티 존스(주연배우)는 경탄할만하다'는 '꾸.안.꾸한날(꾸민듯 안꾸민날)로 바꿨다. 또 다른 포스터에 'leader, lawyer, justice, activist'라는 문구는'독보적인 스타일, 진정한 힙스터, 시대의 아이콘, 핵인싸, 데일리룩'으로 교체되었다.
이 작품의 원제는 무려 'On the Basis of Sex(성별에 근거하여)'다. 영화를 아예 몰라도, 원제만 보더라도 어떻게 '러블리한 날' 같은 문구는 나올 수 없었다. 여성인권 향상에 크게 기여한 입지전적인 인물조차 '꾸안꾸'와 '러블리'와 '데일리룩'으로 포장하는 것은, 여성 주인공일 경우 '외양'을 강조해서 마케팅하던 관습이 반복된 것이다. 심지어 이전에 CGV는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오히려 발명가로서의 업적이 가려진 '헤디 라마'의 삶을 그린 영화 <밤쉘>을 페이스북에 홍보하면서 "이 얼굴 실화…? 공대 아름이의 원조"라고 써서 논란이 된 적도 있다.
독립운동가와 미국 연방대법관을 묘사하면서도 '남성이, 남성사회가 원하는 여성'을 그려내는 상황은, 여성이 '독립적인 존재'로서 온전히 주체성을 인정받기가 얼만큼 어려운지 잘 보여준다. 유관순 열사를 '가련한 희생자'가 아니라, '강인한 투사'로 생각했다면, '순박한 누이'가 아니라 '고등교육을 받고 있던 신여성'으로 봤다면, 투옥 중 사진에 마음 아프더라도 그의 사진을 수정할리가 없다. 적어도 '웃는 얼굴'로 변형하는 정도까진 나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웃는 얼굴로의 보정은 공적인 권위를 부여받아서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할 유관순 열사를 그저 한 명의 '소녀'로 만들었다. 더불어 한국사회가, 정확히 말하자면 남성들이 여성에게 요구하는 '보기 좋은 여성의 모습'을 담았다는 의혹에서도 벗어나기 어렵다. 여성 연예인이 웃고 있지 않으면 '정색한다'며 인성 논란이 일어나고, 여성 후보가 웃지 않는 표정으로 선거 포스터를 찍으면 '싸가지 없다'면서 욕을 먹는 사회다. 이렇게 웃지 않으면 안 될 것같은 무언의 압박을 주면서, 막상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상황이다보니 여성들은 더 이상 억지로 웃는 것을 거부하려고 한다. 여성은 왜 웃어야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지, 여성의 웃는 모습이 왜 '본래의 모습'처럼 여겨지는지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충분히 고민해오지 않았다.
유관순 열사를 기리는 방식은 과거와 달라지고 있다. 이제 어린 나이에 겪었던 고초와 희생에 안타까워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의 신념과 주체적인 모습, 말그대로 일제에 맞서 어떻게 '항거'를 했는지가 더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또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려져있던 독립운동가들이 하나둘씩 조명되면서, 이들은'누이'나 '여인'이 아니라 한 명의 운동 주체로서 다시 기록되고 있다. 남성의 시선에서 여성을 바라보고 기록하고 평가해온 것이 얼마나 정당했는지 돌이켜 볼 시기다. 부디 퇴행만은 말아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