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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Nov 11. 2020

'맞을만 해서 맞았다'? 젠더폭력에 무감각한 남성들

김민식 MBC PD의 칼럼 <지식인의 진짜 책무>를 읽고

많은 중년 남성들이 젠더폭력의 본질을 '젠더'로 인식하지 않는다. 연인 간 부부간에 일어나는 폭력의 대부분은 남성이 가해자다. 그렇다면 사회경제적 구조나 개인의 성격만큼이나 권력을 갖고 있는 특정 성별의 문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중년 남성들은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의 원인을 다른데서 찾는다. 피해자의 '행실'에서 찾고, 술에서 찾고, 심지어 그 주장을 법원이 적극적으로 들어줘서 감형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은 사건들을 '정치 권력의 음모론'으로 보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들은 젠더폭력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문제'가 되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책임을 빙빙 돌렸다. 어쨌거나 '남성'의 문제가 되는 것만큼은 막으려고 애를 썼다. 범죄의 이유조차 찾을 수 없을때는 '남성'이 아닌 '괴물'로 만들고, 강남역 여성살인사건처럼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범죄'로 만들어버렸다.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 사건들이 남성들에게 어떠한 경각심도 주지 못하는 것은, 아주 오래된 '회피'와 '발뺌'의 습관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어떠한 '젠더 감수성' 없이도 잘 살아왔고, 잘 살아갈 것이므로 젠더폭력을 계속 '여성문제'로 미뤄둔다. 심지어 농담과 유희의 대상처럼 여겨서, 아무렇지 않게 2차가해를 저지르기도 한다. 


한 발 더 나아가면, 이들은 젠더폭력을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의 '디딤돌'로 삼는다. 이런 글들의 특징은 겨누는 대상이 '내가 정치적으로 적대하는 세력'에 있다는 것이다. 젠더폭력의 잔혹함이나 가해자의 도덕적 문제를 언급하긴 하지만, 핵심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에 있지 않다. 나와 내 주변의 문제가 아니라, 실체조차 불분명한 더 크고 본질적인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고 떵떵거린다. 


10일자 <한겨레>에 실린 김민식 MBC PD의 <지식인의 진짜 책무>라는 글이 주는 충격은,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어머니탓'을 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나간다는 점에 있었다. 젠더폭력을 불쏘시개 삼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가해'를 선택적으로 편집해서 '남성'을 지우고, 그 자리를 적대시하는 세력이나 인물로 대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의 경우는 아예 피해-가해를 뒤바꿨다. 결국 그가 이런 무모한 짓을 하면서까지 하고 싶었던 말은 "지식인의 선민 의식과 지적우월감은 화를 부른다"에 불과했다. 


현재 이 글은 홈페이지에선 삭제됐다. 그 대신 <한겨레>와 김민식 PD의 사과문으로 대체됐다.


2016년에 그는 <한국일보>를 통해  "어머니가 나를 낳아주셨고, 집에는 마님이 계시고, 딸을 둘 키우고 있어서" 페미니스트가 됐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그는 가정폭력을 가부장제 구조와 무관하게 '사적영역에서 개인 간의 갈등으로 일어나는 일'처럼 여겼기에, 과감히 '도구화'했다. 폭력을 남성의, 즉 '나'의 문제로 여기면 도무지 쓰지 못할 말들이 가득한 글이었다. 


김민식 PD는 사과문에서 "철없는 아들의 글로 인해 혹 상처받으셨을지 모를 어머니께도 죄송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너무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지 않았나 뉘우치게 됩니다"라고 썼다. 그는 어머니를 욕되게 했다는 것에만 송구함을 표하고 있다.  '때릴만하니까 때렸다'는 젠더폭력 가해자들의 변명이나, 2차가해자들의 말을 반복했다는 것은 그에게 중요한 지적이 아닌듯 하다. 


의외로 그의 글에 공감을 표하는 이들이 종종 보였던 것도 충격이었는데, 앞의 다섯 문단이 어떠한 '문제'로도 느껴지지 않으면 가능하다.  젠더폭력을 젠더폭력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적 갈등'에서 비롯된 일로 여기는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앞의 다섯문단은 일종의 우화에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지적 우월감'으로 남편을 구속하는 아내, 존중 받지 못해 화가 난 남편의 사례로 여기며 홀로 교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중년남성들이 성범죄 사건을 이야기할때,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성범죄 없는 사회를 위한 변화'가 아니다. '나와 적대하는 혹은 내가 미워하는 특정 집단의 파산'에 가깝다. 이들은 성범죄의 해결에 별 관심이 없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고, 내가 속한 집단에서, 혹은 내가 행할 수도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른다.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를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의 공천과 엮어 '비례그램 m번방'이라고 비유하던 <민중의소리>만평, 한 방송사 기자의 성추행 피해에 대해, "조국 장관 가족들의 일생을 추행한 것부터 반성하라"고 말한 전우용 교수, 버닝썬 사건때 연예인들의 불법촬영과 약물강간 혐의가 대두될 때도, '진짜 본질'은 박근혜 정권과 관련된 윗선이라고 외치던 586들. 특정 진영만의 문제만으로 보기도 어렵다. ‘오거돈 성추행 사건'때 진중권 전 교수는 '친문인사가 낳은 비극'이라거나 폭로 시기에 대해 “‘친문 여성단체 인사'가 개입한 게 아니냐"는 음모론을 제기했고, 미래통합당은 피해자가 특정될 수 있는 단서를 계속 공표했다. 이런 사례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언급하기도 힘들 정도다. 분명한 것은 이들은 성범죄 해결에 관심이 없다.


견고하고 끈질긴 젠더폭력의 구조는, 여성이 겪는 폭력을 사소화·주변화시키려는 남성들의 '기만'에 의해 구축된다. 어떤 폭력은 의도적으로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이라는 사실이 지워지고, 형체도 파악할 수 없게 '도구'로만 기능하도록 만들어진다. 그렇게 '남성문제'에서 남성들은 자유로웠으며, 심지어 여성들보다 더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그 시절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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