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성의 존재를 지우는 남성권력

책 <폭력의 진부함>을 읽고

by 박정훈

"기자님은 성희롱이나 성추행 당한 적 없으시죠?"


성평등 관련 강의를 함께 한 여자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있긴 있다. 가해자는 매번 남자였다.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수 차례, 군대에서도 '장난' 같았지만 생각해보면 명백한 성추행이었다. 이후에는 한 언론사 면접장에 가서 실수를 했는데, 그 회사 사주에게 "장가갈때도 그거 빼먹고 갈 거야"라는 소리를 들었던 일 정도가 기억이 난다.


물론 내 고통은 대부분의 여성들 앞에서 아주 하찮은 일이 되고 만다. 물론 개개의 피해들이 아팠던 것은 사실이지만, 피해의 강도나 빈도를 비교해봤을 때 나는 그저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선생님 앞에서도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피해에 대해서만 수십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가 쓴 <폭력의 진부함>은 저자가 겪은 폭력을 복기하는 글로 시작한다. 그는 구조화되고 일상화되었기에 더 진부하게 반복되는 '폭력의 역사'를 그려낸다.


평범한 가해자들이 저지르는 평범한 폭력들은, 구체화하고 재해석되어 비로소 '폭력'이라고 명명된다. 이전까지 그것들은 '장난'이고 '놀이'였으며 '관행'에 불과했다. 80년대 중후반부터 지금까지 , 그는 성폭력을 '남성 되기'의 관문처럼 여기며 하나의 문화처럼 '향유'하고, 지금에 와서는 그것을 추억할 것이 자명한 이들에 대해 적는다. 아마 남성들에게는 너무 일상적이라서 기억도 나지 않을, '자연스럽게' 여성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말과 행동도 비로소 '사건화'된다.


r454.jpg


"많은 경우 성폭력 피해자들이 '그때'를 기억하는 이유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를 계속 복기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해자들은 왜 기억을 못 할까. 그들에게는 해석할 필요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아니다. 일상이다. 복기할 필요가 없는 일상이다. (...) 매번 바둑을 둘 때마다 내 마음대로 해도 이기는 판이라면 복기의 필요성을 못 느낄 것이다. (17p)


그는 자신의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역사를 드러내면서, 여성을 하나의 '몸'으로, 오로지 '개별성을 상실한 사적 존재'로만 취급하는 시도에 저항한다. 동시에 사회적 약자에게 '개인적'인 사건은 어째서 개인적이지 않은지를, '얼굴', 이름', '목소리'라는 개념으로 풀어내기 시작한다.


이라영 연구자는 랠프 엘리슨의 소설 <보이지 않는 인간>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여성은 남성에게, 흑인은 백인에게, 장애인은 비장인에게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려고 하지 않는 인간'이다. 단단한 편견 속에 사람을 가두고, 개개인의 고유함과 복잡성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남성이 여성의 얼굴을 보고 논할 때는 여성이 주체로서 자신을 드러냈을 때가 아니라, '남성적 응시', 즉 여성을 포착하고 포박했을 때다. 여성 전문가나 정치인의 공적 발화에서도 '외모'만을 언급하면서 비난을 가하고, 여성을 과녁으로 삼아 불법촬영을 하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응시 권력'을 만끽한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남성은 여성의 얼굴을 계속 지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자성의 본질'(한병철)로서의 얼굴을 삭제하고, 오로지 '미적 대상', '성적 대상'으로서만 품평하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대표적으로 영화 <색, 계>의 장면을 예로 든다. 이(양조위)와 왕자즈(탕웨이)의 관계에서, 이가 폭력적으로 왕자즈를 제압할때, 왕자즈가 고개를 돌려 이의 얼굴을 똑똑히 본다. 이는 크게 당황하고, 왕자즈의 고개를 돌려놓는다. 함께 마주보고, 말을 할 수 있는 존재에게는 지배를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탁현민 청와대 비서관은 2007년 쓴 책 <말할수록 자유로워지다>에서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 성관계를 언급하며 "얼굴이 좀 아니어도 신경 안 썼지. 그 애는 단지 섹스의 대상이니까"(탁 비서관은 뒤늦게 해당 이야기가 '허구'라고 밝혔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남성들은 여성의 얼굴과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권력을 뽐내면서 살았다.


목소리를 무력화시키는 것 역시 남성이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 중 하나다. 이라영 연구자는 영화<미씽: 사라진 여자>의 예를 든다. 한매(공효진)의 남편은 "말을 할 줄 알면 도망간다"라며 집 안에 가두고 한매를 학대한다. 이는 가장 직접적인 케이스이겠지만, 실제로 침묵과 눈치는 여성의 덕목이라 여겨지며, 부드러운 말씨와,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은 태도는 은연 중에 여성들에게만 요구된다. 특히 남성중심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에서 이러한 성역할은 더 크게 강조된다. 남성들은 여성들의 '목줄'을 잡고 흔든다.


그럼에도 겨우 이 틀을 깨고 목소리를 내서 '폭로'하기 시작하면, 목소리의 진위를 의심하고 방식에 문제제기하는 말들이 이어진다.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에는 항상 정치적 음모론이 뒤따르는데, '뒷배'로 지목되는 것은 주로 '중년 남성'으로 상징되는 남성 정치권력이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여성의 목소리를 삭제한다. 나아가 '그럴 사람은 아니야'라든가, '피해자가 이상하다'라는 말은 어떠한가. 사회적 명예와 영향력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남성, 그러니까 수백 수천의 '공적인' '검증된' '힘 있는' 목소리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짓누르는 장면을 우리는 계속 목격하고 있다.


목소리가 없으면, 이름도 존재하지 않는다. 소수자는 공적인 호명에서조차 개별성이 사라진채, 특정한 정체성으로만 존재한다. '○○녀', '여'배우 등등. 또한 남성들이 '사모님'이나 '형수님' 이라는 호칭을 남발하는 것은 악의는 없을지라도, 여성을 남성에게 '속한' 사람으로만 바라보는 가부장적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고 숱하게 지적된 바 있다. 이라영 연구자는 "이름을 부르지 않은 채, 어떤 특정한 정체성만 강조하는 태도는 너는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라며 <한겨레>에서 쓴 "영국 해리 왕자, 흑인혼혈에 이혼한 미국인과 결혼 발표"라는 제목을 예로 든다. 반면 주류와 보편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이름과 직위가 정확하게 붙는다.


책 <폭력의 진부함>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 하고, 이름 없는 자의 이름을 부르자"라고 강조하는데, 이 말은 내게 있어서는 '남성권력이 무엇을 하는지 똑똑히 보라'는 말처럼 들렸다. 이라영 연구자는 '불법이 아닌 폭력'에 대해서 줄곧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여성의 '개인됨'을 막아온 것은 매우 평범하고 착한 얼굴을 한 남성들이 '관습'이라고 말하는 것들이었다. 가벼운 농담과 뒷담화,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품평과 성별에 기반한 압박, 미디어가 '이 정도면 괜찮아'라면서 노출하는 수많은 행동들은 '보이지 않는 사람'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나는 남성들 또한 복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변명의 도구처럼 이용되는 '만들어진 기억'을 위해서가 아닌, 제대로 된 복기 말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제멋대로 말해도 괜찮았다면, 여성을 배제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는 가능했을지를 생각해보자. 아마 남성들은 여성들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살았던 적이 별로 없었음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여성 지우는 사회' 속에서 살아간 남성들은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복기가 아니라, 여성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한 복기를 시작해야 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맞을만 해서 맞았다'? 젠더폭력에 무감각한 남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