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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의 종말

by 박정훈

지난 7월, 서민 단국대 교수는 '탈페미 선언'을 했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꽤 오래 꼴페미 소리를 들었는데 윤미향과 오거돈 박원순 사태를 보며 여가부 폐지에 동의하게 됐습니다"라며 스스로를 '귀순자'라고 칭했다.


남성 정치인의 성폭력이 왜 '여가부 폐지 동의'로 이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그는 달라졌다. 지난 11일의 국민의힘 초선 의원 모임에 가서는 "페미니스트들과도 싸울 수 있어야 한다"고 야당의 자세에 대해 조언했다.


이어 12일에는 KBS 1라디오 <김경래의 최강시사>에 출연해 "맘카페를 가보면 조국 전 장관이나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되게 높은데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사실 잘생긴 게 되게 크거든요. 과연 국민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라고 말한다. 이젠 여성 시민을 '비합리적이고 수준낮은' 유권자의 상징으로 언급하는 수준까지 이르른 것이다.


서 교수가 지금껏 줄곧 ‘페미니즘 팔이'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희진 선생의 책을 페미니즘 입문서로 삼고, 강준만 선생의 '빠'를 자청했으며, 2013년에도 '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이라는 글(<세상에게 어쩌면 스스로에게>라는 책에 수록)로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그는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여성신문에 정기 칼럼을 기고했고, 이를 모아 <여혐, 여자가 무러 어쨌다고>라는 단행본을 냈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 X 민주주의 강연', 인권연대 주최 '제7기 '청소년 인권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주제로 강의를 했고, 이 내용은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EBS <까칠남녀>에서도 '여성 인권' 향상을 강조하며, '안티페미' 남성들과 대립하는 성격의 패널로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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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서 교수는 '중년 남성'이고, '재미있는 글'을 쓴다는 이유로 페미니즘 진영에서 너무나 많은 기회를 얻은 케이스다. 그게 오히려 독이 됐을까? 서 교수에게는 스스로 아직 극복하지 못한 '남성문화'의 잔재들이 있었고, 이는 '농담'으로 위장한 여성혐오적인 표현으로 드러난다. 특히나 여성신문의 칼럼에선 이것이 어떻게 페미니스트의 칼럼일 수 있는지 놀라운 부분이 많다.


"아이와 남편 뒷바라지로 힘들다고, 혹은 회사에서 이런저런 차별로 힘들다고 쉽게 사표를 던지는 일은 삼가자"(여성들이여, 일을 갖자)


"2016년 8월, 모 대학교수는 자신의 책상을 정리하던 조교를 강제로 끌어안았다. 얼마든지 껴안아도 되는 아내분이 집에 계실 텐데도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메갈리아가 기생충보다 못한 존재일까)


"특히 여성이 나와서 같이 놀아주는 술집을 가다보면 월급은 금방 모자란다. 나이가 듦에 따라 노후 대비가 걱정돼 싱글의 즐거움이 점점 줄어들지 않을까"... "그래서 싱글은 참거나 혼자 해결하거나 아니면 업소를 가야 하는데, 맨 마지막은 조심하자. 단속에 걸리면 패가망신하는 수가 있으니까" (“싱글이 행복해” 거짓말 그만두고 여성에게 잘하시라)


"물리 시간에 배운 작용과 반작용이 생각나는 수준 높은 해명이지만, 재판부는 강씨에게 벌금 2000만원을 선고했다. 창의성 별 다섯." (남자는 성추행 후 창의성을 발휘한다 - 성희롱에 대한 남성들의 변명을 별점으로 평가하며 희화화한 글)


가장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글은 '페미니즘이 싫다는 젊은 누이께'라는 글이었다. '여잔데도 페미니스트가 싫어요'라는 한 누리꾼의 글에 반박을 하면서, "이제 스무 살이 된 ○○○님이 이 사실(성차별)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요. 지금이야 ○○○님은 뭇 남성들이 떠받드는 젊은 여성이니까요"라고 지적한다.


이어 "글을 보니 ○○○님이 페미니즘을 너무 막연하게 이해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아쉬웠습니다. 혹시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몇 권이라도 읽어보시면 어떨지요?"라는 조언까지 곁들인다. 오로지 책으로 페미니즘을 배운 그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는 부분이었다.


그는 페미니즘을 일종의 '문명화'로 생각했다. 그래서 신나게 비난하고 조롱해서 남성들을 '계몽'시켜야 한다고 여긴듯 하다. 그렇다보니 종종 그가 ‘(여성을 위하는) 좋은 남성 되기'를 페미니즘과 동일시한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그는 찌질하지 않고, 징징거리지 않고, "가사분담으로 아내에게 기쁨을 주는"(글 <남편들은 왜 깨끗하게 설거지 안할까>) 남성이 되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페미니스트가 되는 일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차별에 대해 구조적으로 인식하고 성찰한다는 것이며, '남성성 부수기'를 비롯해 성차별의 근거를 무력화시키는 실천방식의 모색을 포함한다. 지속적인 '정치적 실천'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자신부터 돌아봐야 했다. 서 교수가 지난 7월 30일 쓴 <[해명] 서민은 탈페미했는가?>라는 글에서, 그의 실패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몇 안되는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제 자부심은 저를 오만하게 만들었고,저는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남성들을 한심한 찌질이로 바라봤습니다. 조선인 친일파가 조선인을 더 모질게 두들겨 팬다고, 남성인 저는 '못 배운' 남성들을 욕하는 데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제 발언이 세질수록 페미 세계에서 제 지위는 높아졌습니다. 어쩌면 그건 대학교수라는 제 직업 덕분이기도 했겠지만,페미니즘에 관한 이슈가 생길 때, 제가 페미계를 대표해서 발언을 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그 권력은 저를 더 우쭐하게 만들었고, 저는 그렇게 꼴페미가 됐습니다."


전문가가 아님에도 서 교수는 숱한 기회를 얻었다. 사실 여성들이 들어갈 자리를 차지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남성이기 때문에' 계속 강연을 요청받고, 지면을 제공받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의 '쓰임'과 '책임'이 무엇인지는 알고, 그에 맞게 행동해야 했다. 그런데 서 교수는 너무도 쉽게, 자신이 몇 년 동안 만든 결과물을 아무 가치가 없게 만들어버렸다. 이는 그를 믿고 함께 페미니즘·인권 콘텐츠를 만든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조롱과 기만과도 같다.


정치적 진영이 달라졌고, 자신이 '페미니즘 계몽'의 주체로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페미니즘을 버렸다. 지금도 민주당에서 일어난 성폭력 문제와 싸우고 있는 여성단체 인사들까지 모두 '위선적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페미니즘은 여전히 필요한 가치"라고 말한다. 어디서 참 많이 본 광경이다. 남성 페미니스트의 지향점이 '좋은 남성', '너보다 똑똑한 나'에 그치면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아주 똑똑히 보여준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나의 가치를 올릴 수 있을 때는 괜찮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손절'할 수 있는 것. 그의 페미니즘은 결국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으로 판명났다. 여성의 '편'에 선다고, 여성을 위하는 말을 한다고 모두 '페미니스트'로 불릴 수 없다는 것을 서 교수로부터 똑똑히 배운다. 나를 비롯한 남성들은 그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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