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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나래에겐 더 많은 기회가 필요하다

이것은 명백한 '백래시'다

by 박정훈


박나래씨가 무려 '성희롱' 혐의(정보통신망법상 불법정보유통)로 수사 받고 있다. 웹예능 '헤이나래'에서 남자인형의 팔을 늘려서 마치 성기인 것처럼 만드는 장난을 쳤다는 이유에서다. 경찰은 국민신문고를 통해 박나래씨를 수사해달라는 내용의 고발장을 접수했고, 고발인 조사까지 마쳤다고 한다. 명백한 '백래시' 현상이다.


인권위는 성희롱을 "업무, 고용, 그 밖의 관계에서 공공기관의 종사자,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그 직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등과 관련하여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보다 넓은 의미로 이야기해도 성희롱은 “범죄의 성립 여부와 관계없이 상대방의 성적 굴욕감, 수치심 또는 혐오감을 일으키는 일체의 행위”(서울대 인권센터)로서, 영어로는 성적 괴롭힘(sexual harassment or gender harassment)이다. 그러므로 성희롱은 단순히 ‘성적인 언행을 보고 난 뒤의 불쾌감’의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위력의 문제에 더 가깝다.


성희롱의 개념에 비춰볼 때, 인형을 갖고 노는 것이 성희롱이 되려면 당시의 상황과 행위의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 남자 상사가 여성 부하직원 보라는 듯 대놓고 포르노를 보는 경우처럼, 이러한 행동이 누군가를 향한, 혹은 누군가가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미필적 고의를 갖고 이뤄졌어야 한다. 만약 박나래씨가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남성 직원을 데려다놓고 인형을 보여주면서 성적인 언동을 했다면 성희롱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헤이나래에서 박나래씨의 인형 장난은 그런 류의 행동이 아니었다.

물론 박나래씨의 행동에 기분이 나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행동은 맥락상 ‘성희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과하거나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는 수준이다. 논란이 일자 박나래씨는 자필 사과문을 올렸고, ‘나 혼자 산다’에서도 재차 사과했다. 대부분의 성희롱 사건은 ‘피해자’가 쉽게 말할 수 없고 가해자는 쉽게 사과하지 않는, '위력이 작동하는' 구조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감안할 때, 박나래씨가 ‘성희롱을 했다’라고 고발당하고 수사받는 것이 더욱 아이러니하다.


누군가는 박나래씨가 아닌 남성 연예인이 여자 인형을 갖고 비슷한 장난을 쳤으면, 방송계에서 살아남기 힘들었을 거라고 말한다. 물론 남성 연예인의 성적인 언행에 더 엄격한 잣대가 적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럴수 밖에 없는 이유는 만약 남성이 여성 인형을 갖고 장난을 친다면, 그것은 실제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주 일상화된 형태의 폭력을 무비판적으로 재현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남성은 여성의 성을 통제하고 규정하는 지배자였고, 실제로 여전히 성폭력 가해자의 98%가 남성 아닌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의 몸에 대해 말하는 것과 남성이 여성의 몸에 대해 말하는 것이 동일하게 여겨질 수는 없는 법이다. 후자는 실재하는 권력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남자라서 뭔 말을 못하겠다고? 그럼 가부장제 끝내고 성평등한 사회 만들면 된다.


보궐선거 이후 정치권에서 일어난 ‘군 가산점 부활 법안 발의’ 등의 백래시가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는듯 하다. 안티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를 언론과 정치인들이 공적으로 인정하고 키워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이번 경우처럼 백래시가 여성 연예인의 커리어를 직접적으로 위협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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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나래씨는 2019년 스탠드업 코미디 <박나래의 농염주의보>를 통해 ‘성적 주체로서의 여성’, ‘욕망하는 여성’의 모습을 드러내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고, 이는 일종의 금기를 깬다는 점에서 전복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박나래씨의 유머가 ‘수사 대상’까지 되어버리면서, 그를 포함한 여성 코미디언들이 '성적 코드'가 담긴 유머를 구사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동시에 자신을 포함한 여성 코미디언이 설 수 있는 자리, 구사할 수 있는 유머의 범주를 계속 넓히려던 박나래씨의 도전 역시 위기에 놓였다.


물론 어떤 사람이 볼 때는 박나래씨가 선을 넘었을 수도, 불쾌한 ‘섹드립’을 쳤을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의 성적 유머가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질 수도, 또 한국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충분히 고찰하지 않은 것으로 느껴질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박나래씨에게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행착오도 겪고, 사과문도 쓸 수 있고, 비판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기회가 부정당하고, 그의 행동이 '성희롱'이라는 단어로 일축되어버리는 상황은 매우 부당하다.


박나래씨의 유머는 여느 남성 예능인들의 불쾌한 그것과는 달랐고,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특히 2019 MBC 연예대상 수상 소감을 다시 읽어보면, 박나래씨가 점점 더 나은 코미디언이 될 것임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박나래씨의 앞길이 적어도 부당한 공격에 의해서 막히지 않기를, 그가 계속 힘내서 도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면요. 저는 착한 사람도 아닙니다. 선한 사람도 아니고. 하지만 예능인 박나래는 TV에 나오면 저의 말 한마디에 행동 하나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박나래는 나빠도 예능인 박나래는 선한 웃음줄 수 있게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저 진짜 열심히 할테니까. 그리고 항상 거만하지 않고 낮은 자세에서 있겠습니다. 어차피 작아서 높이 못 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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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 손희정 선생님의 의견을 참고해서 썼습니다. 두 분이 쓴 글도 꼭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https://www.facebook.com/nayoung.nga/posts/1633624900361077

https://www.facebook.com/peace.n.pride/posts/5368649736541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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