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한 뒤 성추행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의 호칭 두고 논란이 일었다. 한쪽에서는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피해자란 단어를 쓰면 성추행을 기정사실화하게 된다며 피해호소인 또는 피해고소인으로 칭했다. 반대쪽에서는 기존 관행과 달리 피해호소인이라 쓰는 것 자체가 성범죄 사건에서의 피해자 중심주의에 반하고, 2차 피해를 조장한다고 주장했다.
당신은 피해호소인 또는 피해고소인과 피해자 중 어떤 단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이유를 논술하라. (제3의 적절한 호칭이 있다면 논리적 근거와 함께 제시해도 무방함)”
위의 논제는 놀랍게도 2020년 MBC 신입사원 공채(기자 직군)시험에 나온 것입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호소자, 산업재해 피해호소자, 직장갑질 피해호소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호소자, 이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피해가 있다고 법적으로 결정을 내렸든, 보상을 받았든, 그것과 관련없이 ‘피해자’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갑자기 MBC는 ‘박원순 시장 성폭력 의혹’에서만 피해자 호칭을 '논란'으로 만들고, 네가 어떻게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서술하는지 평가해보겠다고 합니다.
피해 호소자라는 말 자체가 '2차가해적'인 단어는 아닙니다. 공동체 내부에서 성폭력 사건을 해결할 때 사용하던 단어입니다. 하지만 사건에 대한 형사적 절차를 진행하는 경우까지 갔을 때는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는 단어기도 합니다. 심지어 여당에서는 '피해호소인'이라는 표현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MBC는 이 주제를 또다시 끌고 나온 것입니다.
누군가의 피해자성이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여길 정도로, 이 사건이 ‘애매한 문제’라는 생각을 내부에서는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 아닐까요? 높으신 분들이 피해자의 주장을 믿고싶지 않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시험문제를 통해 표출한 것이나 다름 없어 보입니다.
MBC가 이 문제를 통해 평가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젠더 이슈를 보는 '합리적' 관점일겁니다. 그런데 일단 그 '합리적'인 관점을 대부분이 중년 남성으로 구성된 방송사 간부들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2018년 8월 기자협회보 보도에 따르면 MBC는 간부급인 팀장 23명 중 4명만이 여성이었습니다).
특히 문제에서 '피해 호소자'를 거론한 것 자체가 이미 수험생들에게는 큰 압박이 됩니다. '피해 호소자'를 주장하는 측의 의견을 무작정 배격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너무 강한 주장을 하지 않았나, 편향적인 의견을 보이지 않았나 스스로 검열할 수밖에 없는 주제입니다. 누가 채점할 건지 뻔히 보이거든요. 게다가 시험관 개개인도 이 이슈에 대해서 명확한 입장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이 시험의 공정성마저 의심스럽게 만듭니다.
누가 지상파 방송 공채시험에서 이런 문제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수험생들에게도 모욕적인 문제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