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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May 07. 2021

계층과 젠더에 따라 '죽음의 등급'도 나눠집니까

선택받지 못한 죽음들


시민단체 '노동건강연대'에서는 2019년 4월부터 매달 '이달의 기업살인'이라는 제목의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온다. 월별로 '기사화된' 산업재해로 인한 죽음만 정리한 내용이었는데, 매달 수십명 단위였다. 실제 사망자는 더 많을 것이다.


다만 '이달의 기업살인'은 처음엔 편집기자들의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기자들은 항상 '새롭고' '시의성 있는' 주제를 담은 글을 좋아한다. 이미 1달 이상 지나간 일을 회고하는, 언론 보도를 쭉 정리해놓은 구성에 기자들은 크게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편집부에 있을 때도 제목도 손보지 않은채 "[20xx년 x월 이달의 기업살인]"과 같이 내보낸 적이 많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무성의하게 제목을 잡고 내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조회수가 꽤 나왔다는 것이다. 메인면에 배치를 안 하거나, 혹은 메인면 하단에 배치를 해도 꽤 많은 사람들이 읽어줬다. 


그런 현상을 보면서 부끄러웠다. 사람이 매달 일터에서 수십 명 죽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너무 무감각해진 것 같아서, 또 언론이 평소에 산재로 죽은 이들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보도하나 싶어서. 다행히 내가 편집부를 떠난 이후에 '이달의 기업살인'은 <오마이뉴스>의 주요 연재 목록에 포함됐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4월에 죽은 노동자들에 대한 글이 올라올 것이다. 그동안 떨어지고, 깔리고, 물체에 맞고, 끼이고, 부딪히고, 불에 타서 노동자들은 죽어갔다. 슬프지만 이번달도 그렇게 죽어간 이들에 대한 보도 내용이 담길 것이다.


어떤 죽음은 너무 크고, 어떤 죽음은 너무 작다. 누군가 죽음은 평등하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우리 사회가 결코 작게 다룰수 없는 죽음들도 있다. 그가 폭력의 피해자일 때, '죽음으로 몰고가는 구조'의 피해자일 때, 참사의 피해자일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명백한 '사회적 타살'일때 등 사망자가 자연사나 사고사가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에 의해 세상을 떠났을 때다. 


하지만 언제나 언론은 이목을 끌 수 있는 기삿거리가 되느냐, 안 되느냐로 죽음을 평가한다. 그래서 상당수의 죽음은 기사화되지 않거나 단신에 그친다. 그 죽음은 하루에 최소 1~2건은 보도되는 산업재해일수도, 어쩌면 열흘에 한 명 꼴(2016~2018년 108건)이라는 교제살인의 하나일 수도 있다.


ⓒ 오마이뉴스 유성호


지난달 말 20대 대학생이 한강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된 사건은 언론이 굉장히 크게 다룬 죽음이다. '사인'이 무엇인지와는 별개로, 언론이 공인이나 유명인이 아닌 이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오랜 기간 집중해서 보도하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처음에는 '한강공원에서 자던 대학생 실종'으로 명명되며 주목받지 못했던 사건은, 사망한 대학생인 고 손정민씨의 아버지가 '아들을 찾습니다'라고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호소하면서 다른 국면을 맞기 시작한다.


특히 친척에 의해 그가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 다니는 '의대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강 실종 의대생' 사건이 되었고, 그의 사망 자체를 '의대생 사망'으로 명명해서 보도하는 언론이 많았다. 의대생이라는 사실이 마치 직업이나 직함인것처럼 말이다.


이 사건의 공론화에는 사망한 대학생의 아버지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 그는 아들을 사랑했고, 아들의 실종을 세상에 크게 알릴 능력이 있었다. 동시에 언론 앞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는 등, 굉장히 정돈된 말로 의혹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자신의 힘으로 아들의 죽음 원인을 규명하자는 의지가 강했으므로, '언론 프렌들리'했다. 이런 유족은 흔치 않다. 언론은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받아 적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유족이 행적을 의심하고 있는 친구 A를 사실상 가해자로 몰아가는 형태의 보도를 반복했다.


아버지는 분통하고 억울하다. 그는 무슨 말이든, 어떤 의혹 제기도 할 수 있다. 문제는 그의 입을 빌려 언론이 사건을 '미스터리 극장' 식으로 확대한다는 데 있다. 의혹의 외피를 쓴 단정적인 발언들과, 일부 전문가나 기자들의 '추정'들이 난무했다. '안타까운 죽음' '억울함을 풀어야된다'는 명분이 보도의 선정성을 덮어주는 셈이다. 언론의 의혹 제기는 경찰이나 검찰의 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도 아니고, 명확한 근거를 제시한다고 하기에는 매우 분절적이다. 만약 A가 가해자가 아닐 경우 언론은 그에게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힌다는 점에서 너무나 위험한 보도 행태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그가 잘못이 없다고 해도 대중들이 믿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물론 이런 지점을 고민하는 언론사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곳이 더 많기 때문에 1주일 가까이 '한강 대학생 사망 사건'이 포털 뉴스의 메인을 장식하고 있다.


손정민씨의 죽음은 애석한 일이고, 나 역시 그의 죽음 원인이 수사 결과를 통해 드러나길 바란다. 하지만 '다른 죽음들은?'이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의 언론 구조에서 작고 힘 없는 개인 한 명 한 명의 죽음을 모두 기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수십, 수백, 수천명 되는 직업병 사망자들, 산재 사망자들, 살해당하는 소수자·약자들의 죽음 역시 안타깝고, 억울함을 풀어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 아닌가. 사실 그것은 너무 일상적인 죽음이기에 오히려 외면당한 측면이 있다.


반올림 대표였던 황상기씨가 딸인 고 황유미씨의 죽음을 삼성으로부터 '직업병'으로 인정받기까지 11년이 걸렸다. 물론 이 역시 언론사들이 꾸준히 보도했던 일이긴 하지만, 만약에 방송사들이 이번 '한강 대학생 사망 사건'을 다루는 방식처럼 '삼성이 가해자'라는 의혹을 며칠 내내 집중적으로 이야기했더라면, 황상기씨의 주장 하나하나를 속보식으로 보도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삼성의 사과가 이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무조건 좋은 방식이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슈를 다루느냐의 여부를 떠나서, 언론은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충분히 집중할 역량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증명해냈다. 다만 어떤 종류의 죽음은 대중의 흥미를 끌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스스로 기사 가치가 떨어진다고 여길 수 있다. 아니면 손정민씨 아버지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작고 낮게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는 목소리는 기자들에게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언론은 '가시화되지 않은', 그러나 사회 구조에 의해 '약자라서' 희생된 형태의 죽음들을 부단히 찾아나서야 하며, 적어도 시민들이 공론화한 죽음들에 대해서는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더 낮은 곳의, 더 보이지 않는 곳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무 뻔하고 고리타분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언론의 사명이다. 언론이 꼭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 직접 억울함을 풀어줘야 할 죽음들이 있는 것이다.


뉴스 채널과 언론사 유튜브 등에서는 고 손정민씨의 발인과 아버지와 친구가 추도문을 읽는 장면도 보도했다. 애석하고 슬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언론이 추도문 한 장 없이 잊힌 죽음에 대해서도 충분히 보도했는지 되돌아봐야 할 때라고 느꼈다. 기업이나 국가 등 숨은 가해자가 있거나, 부조리한 사회적 구조에 기인한 죽음을 기릴 수 있는 '추도문 같은' 보도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달의 기업살인' 기사를 공유하며 마음 아파하던 독자들처럼,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보도를 진심으로 원하고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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