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글쓴이'를 기대합니다
한국인은 글을 잘 쓴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렇다. 게스트하우스 방명록을 보면 다들 정말 성심성의껏 글을 적는데, 볼 때마다 놀라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다. 여행 당시의 감정이나 상황을 굉장히 자세하게 묘사함은 물론, 솔직하고 정확하게 감정을 표현한다 (물론 상당수가 '좋다' 일색인건 아쉽지만). 라디오 사연은 또 어떤가. 나는 외국과 달리 사연 중심의 라디오 프로그램의 발전에는 여성들의 글빨이 큰 공헌을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들이 일부 각색은 했겠지만, 애초에 '원석'이 좋지 않으면 그렇게 재미있는 꽁트가 가능할리가 있겠는가.
나는 '한국인은 문해력이 안 좋다' 이런 말을 믿지 않는다(통계적으로도 충분히 반박된 바 있다). '글쓰기 후진국'이니 이런 말은 더더욱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이들이 너무 오만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쨌든 한국은 문맹률이 낮고,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높은 나라다. 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는 조건이 충분히 마련됐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자기 표현'을 지양하고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 혹은 문화다. 공개적으로 글쓰는 것을 어색해하거나 지레 겁먹는 경우가 많다. 나는 아직도 무엇이 좋은 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일 높게 치는 것은 '고유성'이다.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 가장 좋은 글이며, 그러므로 한 명 한 명의 개인이 모두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글쓰기 스킬이라는 게 필요한지 의문을 가질 때가 많다. 특히 에세이의 경우는 더더욱. 시험용 글쓰기나 어떤 특정한 직업에서만 사용하는 글쓰기는 당연히 규격화된 형식에 맞추는 일이 글쓰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하지만 에세이에 왕도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은유님이나 홍승은님의 글이 좀 더 글쓰기 책으로서 내게 와닿았는지도 모른다. 무슨 리드가 어떻고 구성이 어떻고... 그게 아니라 한 사람으로부터 어떻게 글을 끌어내는지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
솔직히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모르겠다. 좋은 이야기는 문장을 압도한다. 단문으로 쓰라는 이야기도 소수 프로의 영역에서나 하는 이야기고, 일반적인 경우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처음 무언가를 써 보는 사람에게는 문장 이야기는 하나도 안 했으면 좋겠다. 그건 나중에 해도 된다. 일단 써야 한다. 하나라도 더 나만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누군가를 모사하지 않고, 일단 써보라고, 밀고 나가라고 말해줘야 한다.
글쓰기는 쉽지 않다. 기본적인 난이도가 있다. 하지만 그만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리할 수 있다. 특히 부정적이고 슬픈 감정, 고통들에 대해서는 쓰면서 일정 부분 해소하는 측면이 있다. 동시에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경험과 감정의 폭이 넓고 다채로워진다. 물론 혼자 일기를 쓴다고 되는 건 아니다. 글을 통해 지지와 공감을 받는 일은 너무나 중요하다. 나의 글쓰기도 어린 시절에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시작됐고, 사실 지금도 타인과의 교감이 즐거워서 계속 글을 쓴다.
교수, 언론인, 작가... 만날 쓰는 사람들만 쓴다. 추상적이고, 근엄하고, 가르치려는 글들 아주 신물이 난다. 세상의 이치를 전부 깨달은 양 힘 빡 주고 쓰지만, 실제로는 고통을 모르는 사람들이 고통을 이야기하는데 그런 글들이 무슨 힘이 있나. 나 또한 기사를 편집할 때 규격에 맞고 문장이 탄탄하고 적당한 논조의 글들을 볼 때 편안했지만, 세상에 이런 글들만 존재하는 건 끔찍할 거라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글 쓰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물론 글쓰기는 매번 0에서 시작하는 일이고, 많이 한다고 딱히 느는 것 같지도 않고, 잘 쓴다고 특별히 밥벌이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쉽사리 누군가한테 글을 쓰라고 권유도 잘 못하겠다. 그럼에도 나는 각각의 사람들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더 많이 보고 싶다. 자신만의 글을 쓰는 이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와서, 자신이 글을 좀 쓴다고 자부하는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래서 항상 나는 또 다른 글쓴이의 등장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