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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Feb 19. 2022

4년 전, 61만 명이 김보름 선수를 향해 돌을 던졌다

나는 '비난의 정도'를 따지는 일에 민감하기 위해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정말 악행을 저지르고도 별다른 비난을 받지 않는다. 반면 어떤 사람은 잘못이 없거나 아주 실낱같은 실수를 했음에도 온갖 모욕을 듣는다. 후자의 억울함과 고통이 눈에 선히 보여서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할 때가 많았다.


단지 '내 기분이 상했다'가 아니라, 공인인가 그렇지 않은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는가 등등에 대해 가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부당한 비난이라고 느껴지는 일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매번 쉽게 "그만합시다"라고 이야기하지 못했다. 비난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어쨌든 일정 수준의 문제를 일으킨 경우에는, '비난의 정도'를 가늠해야 한다는 주장이 개인의 잘못된 행위마저 두둔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나 역시 '좌표'가 찍히고 'ㅇㅇ을 쉴드치는 사람'이라며 심하게 비난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최근 송지아씨에 대한 비난은 정말 '광기' 그 자체였다. '가품 사용'과 이를 통해 수익을 창출한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그것 뿐이다. 그는 사람을 모욕하거나, 때리거나, 죽이지 않았다. 문제는 그 어떤 폭력을 저지른 유명인들보다 그에게 향하는 비난이 더 크고 가혹했다는 것이다. 1월 한 달 동안 온갖 사이버렉카들과 인스타 카드뉴스(?) 계정들은 '프리지아의 실체'와 같은 글로 도배를 했다. 


잘못은 하나인데, 그걸로 만들어내는 콘텐츠는 수백가지였다. 대중은 명품을 즐겨 입는 '쿨한' 여성의 이미지를 통해 스타가 된 그의 몰락을 즐겼다. '진짜 부자'가 아님을 조롱하고, 당시에는 함께 웃고 즐겼던 과거 방송 출연 영상도 그의 비난 근거로 쓰였다. 가족관계 등 송지아씨가 대중에 공개한 모든 것이 물고 뜯을 수 있는 가십이 됐다. '정의 구현'의 명목으로 '낙인찍기'라는 놀이가 연일 이어지고 있었고, 이를 사이버렉카와 언론들이 더 부추겼다. 자정 여론은 일부 커뮤니티에서만 나왔다.


4년 전에는 스피드 스케이팅 국가대표 김보름 선수에게 비슷한 수준의 비난이 쏟아졌다. 김보름 선수의 잘못은 없었다. 대중의 심기를 감히 거스르게 한 지점이라면 팀추월 경기를 잘 하지 못했고, 인터뷰 태도가 '사람들이 보기에' 겸손(?)하지 못했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파벌파문의 가해자 측이며, 다른 선수를 왕따한 것처럼 기정 사실화했다.


그런데 그가 받은 비난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의 선수 박탈 청원에 61만 4000명이 동참했다. 청원 내용도 황당했다. "개인의 영달에 눈이 멀어 같은 동료인 노선영 선수를 버리고 본인들만 앞서나갔다. 인터뷰는 더 가관이었다. 인성이 결여된 자들이 한 국가의 올림픽 대표 선수라는 것은 명백한 국가 망신입니다(...) 대통령님 일정이 많아 바쁘시겠지만 대선 때 공약으로 내거신 적폐청산 반드시 해주시기 바랍니다."


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정의감'이란 말인가. 탄핵 국면에서 처음에 대중들은 판사, 국회의원, 재벌 등 힘있는 사람들을 압박했다. 그러다가 대선 이후에는 '적폐청산을 막는다'라며 대통령을 비판하는 일개 개인마저 '조리돌림'하는 현상이 나타나더니, 이제는 스포츠 선수에게 적폐청산이라는 정의의 기표를 씌워서 공격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김보름 선수를 '적폐'로 몰아세운 이유는 고작해야 '감히 어린 여자애가 버르장 머리 없이 인터뷰를 하다니' 수준의 고까움에 불과했다. 유치하고 저열했다. 


송지아씨의 가품 사용, 김보름 선수의 인터뷰는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정의롭지 않은 것'이 아니라 '거슬리는' 행동에 더 가깝다. 이에 대한 반응은 종종 분노의 외피를 띄지만, 실은 '어딜 감히' 정서에 근거한다. 

더불어 너무나 나쁜 판결을 내린 판사보다, 수백억 원대의 사기를 친 범죄자보다, 성폭력 가해자보다 그들이 많은 비난을 받는 이유는 '비난의 효능감'이다. 유튜버나 스포츠 선수는 대중의 지지와 응원이 굉장히 큰 자산이다. 그런데 이들이 '감히' 거슬리는 행동을 했으니, 비난을 퍼부어서 무릎을 꿇혀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화난다'가 아닌 '거슬리는', '감히'와 같은 감정을 누구에게 느끼냐는 것이다. 결국 대중이 보기에 만만한 대상, 내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대상에게 그런 감정을 갖게 된다. 힘이 있고, 권위가 있는 사람은 '분노'나 '불만'을 표출하며 지탄하는데 그치는 반면, 그렇지 않은 이들은 완벽하게 추락할 때까지 몰아붙인다.

그렇다면 만만한 대상이란 누구일까. 당연히 멀게만 느껴지는 어떤 '구조'보다는 빠르게 '반응'이 오는 개인일 것이며, 개인 중에서도 빈자, 여성, 청년, 장애인, 성소수자 등등 상대적 약자들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개인에게 어마어마한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믿을 때, 폭력은 더 잔인해지고 강력하게 나타난다. 때문에 젊은 여성이 직업불문하고 극심한 온라인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허용되는 '여성의 태도'나 '여성의 감정 표현'이 매우 제한되어 있고, 그 규범에서 벗어나면 '감히'가 나오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남성을 ‘거슬리게 하는’ 페미니스트여서도 안 된다). 수많은 여성 연예인의 '태도 논란'는 대부분 그런 맥락에서 발생한다. 


김보름 선수가 오늘 올림픽 '매스 스타트' 경기에 출전했다. 청원에 참여한 61만 명은, 또 그 대중들을 부추긴 언론인들은 오늘 어떤 생각으로 그 경기를 봤을지 궁금하다. '실수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자신이 클릭 버튼을 누른지조차 기억 못하고 있을까? 폭력에 가담한 사람은 이리도 많은데, 왜 반성하는 사람은 이리도 적은 것일까?


우리는 쉽게 폭력에 가담할 수 있고, 동시에 그 사실을 잊고 산다. 너무나 쉽게 조롱하고 비난할 수 있다면, 그 자체에서 이상함을 느껴야 한다. 온당한 분노가 아니라, '어딜 감히'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리고 언제나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버렸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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