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한 당신과 내가 해야 할 일
주말에 서민 교수가 쓴 <여혐, 여자가 뭘 어쨌다고>를 읽었는데, 조금 불쾌했다. 구석구석 다양한 이슈에 대한 '찌질한 남자'들의 반응들을 그들의 댓글과 함께 '까준 것'은 좋았다. 그런데 디테일에서 속칭 '빻은' 부분이 많았다. "당신은 연예인이나 재벌이 아니기 때문에 꽃뱀이 접근하지 않는다"라거나 성희롱하지 말고 키스하고 싶으면 속히 집에가서 아내에게 물어보시라는 식의 나이브한 이야기부터 지적할게 한 두개가 아니었다.
특히 문제적인 부분이라고 생각된 것은 '남자가 창의성을 발휘할 때'라는 제목의 글이었는데 8건의 성추행에 대한 남자들의 변명을 ' 창의력 별 다섯개 만점에 몇 개'라며 평가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심각한 문제를 희화화한것처럼 느껴졌다.
서민 교수는 <까칠남녀>나 칼럼등을 통해서 여혐러들에게 일침을 가했고, 이로 인해 많은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한 노력들에 대해서 충분히 감사하게 생각하기에, 이 책의 내용이 너무 아쉽다. 2017년에 출판한 책인데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걸까?
"모호하고 낡은 표현, 걸리는 부분이 있다", " 빻은 예시들도 많다"는 알라딘 서평을 보면 나와 같이 느낀 이들이 꽤 있는 것 같다. 이제 남자가 남자를 공격한다'는 것만으로 의미를 가지던 때는 지나갔다. 제 아무리 진보적이고 '성평등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해도, 지금 흐름에 맞춰나가는 자세를 보이지 못한다면 필연적으로 실수를 하게 된다.
반면 며칠 전에 읽은 최승범 선생님이 쓴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는 남성이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모습이 담겨있어서 인상적이었다. 특히 학교에서의 '실천'은 배우고 참고할 지점이 있었다. 그에게선 남성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의 의미에 대한 고민이 느껴졌다. 남성이 말하는 페미니즘은 남성을 설득하는데는 효과가 있지만, 역설적으로 여성의 목소리나 위치를 빼앗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점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역할 및 한계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꾸준히 경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듯했다. 그래서 어떤 부분에서는 조금은 수세적(?)인 서술이라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2018년의 페미니즘 흐름과 호흡하는 이 책은 현재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남성들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하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미투 운동 국면에서 '분노'를 터트리면서 가해자를 강하게 비판하는 남성들이 떠올랐는데, 더 이상 '남성의 비판'은 그 자체로 페미니즘 이슈에선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처음에는 놀라거나 분노하더라도 이후에는 '찔려야' 정상이고, 남성이 '찔릴 때의' 그 죄책감이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여느 진보적 성향의 남성들처럼 살아왔다. 학창시절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었고, 대학 다닐때 페미니즘 강의도 열심히 들었고 관련 책도 종종 읽었다. 주류 남성들과 자주 어울리지도 않았고 가부장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페미니즘을 지지했고 마초들을 비판하는 글도 자주 써왔다. 언제나 '나 정도면 괜찮다'고 믿었다.
그런데 미투 운동을 보면서 내가 살아오면서 저지른 '죄'를 돌이켜보게 됐다. 미투 운동을 통해 여성들이 내게 일깨워준 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했던 (사적인 관계에서의) 많은 행동이 성폭력 내지는 젠더 우위를 기반으로 한 폭력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리다 보니 나 자신도 화들짝 놀랄만큼 부끄러운 기억이 많았다. 불법을 저지른 적은 없지만 결코 나는 '괜찮은 인간'이 아니었다. 지금의 내가 '가해 행위'라고 말할만한 행동을 과거의 나는 거리낌없이 했다.
나는 이런저런 글을 통해서 '깨어있는 남성'의 지위를 얻으며, 동시에 어떤 글은 '여혐러들과 나는 다르다'는 식으로 해석돼 나의 '가해자성'을 지웠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상은 나 자신부터가 떳떳하지 못했다. 항상 공격하고 있는 남자 군상들과 엄청나게 다르지도 않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페미니즘 관련 개념있는(?) 말을 하는 남자들을 괜히 '올려치기' 하지 말자는 입장이나, 누군가 여초카페에 퍼간 내 글에 대해 '글쓴이가 남자라서 안 읽었다'는 반응도 서운하지만 수긍할수밖에 없었다.
남자로서의 '부당이득'을 취하며 '가해자'로서 살지 않음은 물론, 나를 드러내기 위해 페미니즘을 도구화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하게 되는 요즘이다.
사실 나를 포함한 남성들은 성폭력이나 성차별 그밖에 여러 젠더 문제에 관해서 너무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소위 진보 성향의 남성들은 여성 억압적 구조나 성폭력 문화에 대한 비판은 어쩔 때보면 여성들보다도 더 잘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사회정의적' 관점에서 나쁘고, 이들은 그런 것들을 비판하는데 아주 익숙해있으니까. 그런데 이들의 문제는 자기가 그 구조의 수혜자이며, 동시에 폭력을 가할수도 있는 '잠재적 가해자'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해구조나 가해자를 아주 강하게 비판하며, 그들과 자신을 분리하는 것은 자기만족적인 행위에 가까울 뿐이다.
'여혐러'들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일만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연대나 지지를 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그들이 말하는 '역차별'이나 '남혐사회' 같은 이야기들은 황당한 주장들이고 반박하기가 쉽다. 내가, 우리가, 남자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성찰하는 과정이 없다면, 자신도 여성혐오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한 '공범자'라는 인식이 없다면 무엇이 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체 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남성들은 '비판'에만 열중하는 것일까? 왜 남성들은 언제나 3인칭으로 '나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논조로 이야기할까? 그게 내 스스로도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왜 여성들은 끊임없이 업그레이드 해나가는데, 남성들은 여전히 꼿꼿하게 그 자리에서 '에헴' 하면서 훈장질로 일관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그냥 당신이 '성평등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해서 저절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배우고 고민하고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 정도면 괜찮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나 아니었고, 아마 당신도 아닐 것이다. 자신이 '깨어있다'고 자부한다면 현재진행형으로 여성들과 함께 고민하고 싸우며 그 속에서 성찰과 변화의 목소리를 내는 게 맞다.
지난해 12월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한샘 성폭력 사건을 다루며 "성폭력 피해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가 도울께요""침묵하지 않겠습니다" 등의 구호를 남성 연예인 다수가 외치는 '캠페인 영상'을 내보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반응은 당시도 싸늘했고, 지금도 가끔 이 캠페인 나온 사람들 뭐하고 있냐는 조롱이 나온다. 왜 그럴까?
먼저 성폭력 근절 캠페인에 '남자'들만 나온것이 문제였고, 두번째로 이들이 자신이 묵인하고 방관했던 성폭력 문화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단순한 캠페인성 구호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였다. 분명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좋은 뜻으로 캠페인 영상을 만들었음에도 이러한 반응이 나온것은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들이 '입 바른 말'이나 하면 되는 시대는 지나갔다. 미투 운동의 화살은 '가해자의 단죄'뿐만 아니라, 썩은 남성사회 전반을 겨눈다. 그렇다면 그 사회의 질서에 동조하거나 적극적으로 가담해온 남성들이 이제 해야할 것은 '반성'과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회복적 다짐'뿐이다. 성찰하지 않는 '오만한 남자'들은 폼 잡는 게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