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운동의 의의
미투운동은 결국 한국 남자들의 '관계 맺기' 형태 전반을 개혁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많은 남성들은 연애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인간관계 맺기의 원형을 '수직적'이라고 생각하며, 매우 폭력적으로 관계를 가져가면서도 남들도 다 그러니 그게 맞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미투는 그동안 남성들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으며, 약자들을 괴롭혔는지 알려주고 있다. 권력을 가진 남성들이 여성과 관계 맺는 방식을 보라. 이들에겐 주종관계가 곧 사랑의 방식이다. 그게 아니면 사랑할 줄 모른다. 애초에 다른 방식을 배우지도 못했다. 정복해야 하고, '가져야' 한다. 그래야 사랑할 수 있다. 이들은 여성이 말할 줄 모른다고 생각한다. 소극적 저항은 정복을 수용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사랑을 가장한 성폭력은 완성된다. 물론 이 관계에서 말하는 여성은 이미 그에게 여성이 아니다. 남성이거나 아니면 엄마 같은 '성녀'일 뿐이다. 즉 여성은 '거부'라는 선택지를 갖고 있지 않다. 남성들은 '여성의 거부 표시'를 자신의 요구를 수용하기 전의 거쳐야 할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할 뿐이다. 즉 거부 표시는 효력이 없다. 성폭행뿐만 아니다. 성희롱, 성추행 전부 마찬가지 메커니즘을 지닌다. 중요한 건 여성은 어쨌든 거부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말로는 물론 여성의 주체성을 운운하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여성의 주체성은 '내 말에 동조하는 주체성' 정도일 것이다.
'No Means No',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 존중은 여전히 남자들에게 어려운 개념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No Means No'를 이해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과거의 나를 포함해서 남자들이 여자의 감정의 흐름을 읽고 그 흐름에 맞춰가려고 노력 자체를 안 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왜 No라고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No에 화만 낼 뿐. 거래처 직원을 만나듯, 인터뷰이를 만나듯 상대방의 감정을 읽고 어조의 변화에서 기분을 감지하면 그게 진짜 어려울까? 이들이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감정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거다. 그저 반려견, 아니 그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적당히 잘해주고 적당히 달래며 관계를 이어가는 행태는 안희정 전 지사의 텔레그램에서 잘 보여주지 않나. 그건 동등한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아니다. 명백히 자신이 위에 있다고 믿고,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하는 행태다. 애초에 여성을 자기 밑으로 두는데 'No Means No'가 어떻게 이해가 되겠나. 이제 남성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엉망으로 관계를 맺어왔는지 돌이켜봐야 한다. 우리는 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