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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Sep 21. 2018

당신은 '잘난 여성'을 만날 준비가 됐습니까?

'동굴 속 황제'를 벗어나 여성과 평등한 관계 맺을 수 있어야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나보다 조금 잘난 남자(소득, 학벌 등)를 만나라'는 말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여성들이 속물이거나 가부장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 그런 게 아니다. 상당수의 남성들이 자신이 만나는 여성들보다 무능하다고 느꼈을때, 열등감을 느끼고 피해의식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어떠한 압박을 주지 않는데도, 남자 스스로 가부장제의 끈에 묶여서 온갖 힘든 척 불쌍한 척 다 하고 '자기 혐오' 뿜뿜하니, 옆에서 견딜 수가 있겠는가. 물론 애초에 '잘난 여성'을 만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도 경제평론가 카츠마 카즈요의 책을 인용하며 '조금 잘난 남성'을 왜 여성들이 선호하는지 보여준다.

"그녀는 '좋은 남자 파트너'의 조건으로 '연소득 1천만엔 이상'을 들고 있는데(...)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가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연소득 600만엔'(필자가 상정한 자립적인 여성의 조건)의 여성에 대하여 그 정도의 소득이 없으면 남자의 자존심이 살지 못한다'는 경험 법칙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남성과 여성의 균형은 끝까지 남성 우위를 지킴으로써, 다시 말해 '여자가 남자를 떠받드는' 것에 의해 간신히 유지되는 연약한 것임을 그녀는 경험으로 터득한 것 같다. 이렇게나 무르고 불안한 것이 남성의 아이덴티티다"

결혼하지 않은 평범한 남성들에게 '자신보다 능력있는 여성'과의 결혼을 이야기하면 대부분 "와이프가 나보다 돈 잘 벌면 좋지 않냐?"라고 대꾸할 것이다. 그러나 '잘난 여성'과의 결혼은 실상 이들이 살아온 가부장제 가정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남성집단 사이에서도 '은근히 무시 받게된다'는 점을 이들은 간과하고 있다.

실제 '여자의 소득이 훨씬 높은 집'의 이야기를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아빠 친구들을 중심으로 한 부부동반 모임에서는 '아내가 유치원 사업을 통해 돈을 많이 벌고 아빠는 공무원 명예퇴직'을 한 케이스가 있다. 엄마의 말에 의하자면  "부인이 돈을 더 많이 버니까 남편 입장에서 처음에는 좋았지만, 나중에 가보니까 돈 버느냐고 집에 신경도 별로 안쓰는 것 같고 이런저런 불만이 많이 생기더라"가 이 집의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엄마는 은연 중에 "그렇게 여자가 돈을 '훨씬' 많이 벌어도 꼭 좋은 건 아냐"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아마 모임에 있는 다른 여성들과도 비슷한 이야기를 공유했을 것이다. 아내의 고소득으로 남편들의 '알량한 자존심'이 무너지고 피해의식을 끊임없이 표출하게 되면,  '화목한 가정'은 당연히 불가능하니까.

최근 가수 이상순씨가 '멋진 남성상'으로 부각되고 있다. '자상하다' '유머러스하다' '살림을 잘한다' 등이 호감 요소라는데, 나는 좀 의아했다. 누군가와 같이 살기 위해선 저런 것들은 기본적인 요소들 아닌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성들이 칭찬하는 부분도 이해가 갔다. 이효리 같은 슈퍼스타를 저렇게 '내조'하면서, 전혀 기죽지도 않고 유쾌한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면은 자신감을 기반으로 한다) 즉 '평등한 관계를 맺을줄 아는 남자'가 우리 사회에 '좋은 남성상'으로 제시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못나면 후려치고, 잘나면 열등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여성과의 관계를 동등하게 맺으려는 남성들이 그만큼 많이 없다.

여전히 대부분의 남성들과 남성 집단에서는 자신의 애인이나 아내보다 '능력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 한다. 작고한 정치학자 전인권은 이런 남성들을 '동굴 속 황제'라고 지칭하며 비판한다. 전인권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고백하며 어머니의 사랑이 자신에게 '도덕적으로 선하며 훌륭한 사람이라는 우상', '특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우상, 최종적으로 '이 세상은 내가 의도한 대로 움직여야 하는 우상'을 줬다며, 이는 '동굴 속 황제의 우상'이라고 할만하다고 말한다. 엄마의 지극한 사랑 속에서, 가부장제의 '아들 본위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이라면 모두 그가 말하는  '동굴 속 황제'다. 나도 마찬가지다.

전인권은 이러한 '동굴 속 황제'들의 허영심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중 '동굴 속 황제들이 '진선미의 화신'임을 주장하며, 이 사실을 끊임없이 타인에게 주지시키려 한다'는 부분은 주목할만하다.

이 내용에 근거하자면 '잘난 여성'들 앞에서 남성들은 '동굴 속 황제'는커녕 동굴 속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전인권은 "동굴 속 황제는 신분이 높은 사람앞에서는 진선미를 다툴 생각조차 못하며, 전근대적인 '신분적 인간'"이라고 지적한다. 당연히 신분적 인간은 나보다 '잘난 여성'에게 황제처럼 군림할 수 없고, 이에 대한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전히 '동굴 속 황제'들은 마음 속으로 또 다른 '어머니', "아이구 우리 아들 그랬쪄요"하는 여성을 원한다. 체감하기로는 여성들보다 남자들이 조금 더 잘 삐지는데 ,'삐지는 것' 의 근본 심리는 "왜 나의 기분을 네가 알아서 챙기지 못하냐"다. 동굴 속 황제들인 한남들은 여전히 나를 황제로 모셔줄, 나의 허영심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남성들의 심리를 아주 적나라하게 말해주는, '말도 안되는 저출산 대책'을 제시한 논문이 발표돼 한때 큰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지난 2월 발표된 원종욱 한국사회보건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의 논문이다. 문제가 된 부분을 인용하겠다.

"고학력 고소득 여성이 소득과 학력수준이 낮은 남성과도 결혼을 할 수 있게 만들수 있다면 유배우율(배우자가 있는 비율)을 상승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 채용과정에서 채용 요건을 명확하게 하고 불필요한 스펙(휴학, 연수, 학위, 자격증, 언어능력)을 명시하고 오히려 채용에 불리한 요건으로 작용하게 한다면 일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홍보 차원을 넘어서 거의 백색 음모 수준으로 철저하게 기획되고 추진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저출산 문제를 ‘잘난 여성’을 차별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생각, 저열한 생각이지만 진단은 정확하다. ‘잘난 여성’은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정상 가족 체제’를 위협한다. 과거처럼 남성의 ‘자존심’을 감히 흔들지 않는 여성들이 많지 않다면 남성들은 보다 수월하게 ‘제2의 어머니’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중년 남성들이 상상하는 ‘유토피아’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시대의 변화 흐름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말 ‘백색 음모’ 수준으로 철저하게 기획되고 추진하려면 피해의식 느끼지 않는 ‘잘난 여성’과 결혼할 수 있는 ‘건강한’ 남성상을 부각하는 시도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영화 <히든 피겨스>는 잘난 여성과 결혼하는 남성의 당당하면서도 동시에 겸손한 태도를 보여주는데, 이런걸 '좀 따라해보라'며 널리 퍼트릴 필요는 있을 듯하다.


<히든 피겨스>에서 주인공 캐서린의 남편 짐은 처음 캐서린을 만났을 때 큰 실수를 한다.  



짐: 나사에 전산원으로 계신다고요 어떤 일 하세요?

캐서린: 우주선 이 착륙에 필요한 이런저런계산들을 하고 있어요

짐: 막중한 일이군요 (표정이 '여자가 그런일까지 한단 말야??'의 느낌)

캐서린: 그렇죠.

짐: 거기선 여자들에게 그런일을...

캐서린: (정색)

짐: 그런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캐서린: 그럼 무슨 뜻인데요?

짐: 그 어려운 일을 하신다니 놀라서 (어버버) 


캐서린은 그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했고 짐은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으나 이미 상황은 틀어진 뒤였다. 


그러나 짐은 기죽지 않고 파티때 꽃을 들고 다시 한번 찾아온다. 사과를 하러 왔다고 말하고, 정중하게 춤을 권한다. 그리고 정확히 아래와 같이 말하며 사과한다.


짐: 미안해요, 캐서린

캐서린: 뭐가요?

짐: 당신을 과소평가해서, 당신 같은 여성들도 과소평가했고, 당신 같은 여성이 많진 않지만.


첫 키스신도 인상적이다. 그들은 캐서린의 집에서 설거지를 함께 한 뒤에 키스를 했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괜찮은 남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시혜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쓴 나사 국장이 아니라, 나사의 수학 천재와 부부로서 평등한 관계를 맺은 짐 대령이었다. 특히 청혼장면은 짐이 캐서린의 딸 세명과 어머니가 있는 모계사회(?)로의 입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한국 남성들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 '잘난 여성'은 더 늘어난다. 그리고 그들은 '한심한 남자'들과 결혼할 바에는 '비혼'을 택한다. 더 이상 황제로 군림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래도 남자라면 이래야 된다'며 동굴 속에 갇혀 끊임없는 자기혐오를 견뎌낼 것인가? 아니면 동굴에서 뛰쳐나와 '박탈감'이라는 짐을 덜어내고 여성과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로 설 것인가? 후자가 당연히 옳은 길이며, 그래서 남성에게도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은 '남성에게 요구되는 압박에서의 탈출구'를 만드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페미니즘 강의를 듣고, 책을 보고, 근 2년간의 페미니즘 열풍을 보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됐다. 가부장제를 해부하는 페미니즘은 그 시스템 하에 살고 있는 개인인 나를 재발견하게 만들었다. 내게 어떤 결핍과 콤플렉스가 있고, 그것들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도 깨닫게 했다. 그때부터 과거 나의 이상한 행동이나, 어떤 집단에서의 부적응이 차츰 규명이 됐고, 내 부족함을 인정하고 반성할 수 있었다. 나아가 내게 어울리는 삶의 형태나 '관계 맺음'의 방식이 무엇인지가 조금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지독한 가부장제 시스템을 유지해오고, 그것으로 인해 특권을 누리려고 했던 남성들이  '한심하게 치부되는' 광경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남성으로서 살아왔던 나의 삶을 돌아보고, 나의 남성성을 만든 이 체제를 조망하는 것, 즉 남성으로서 페미니즘을 알아가는 것은 분명 남성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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