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허수경은 왜 써야만 했을까
"내 허수경이 소설을 요번에 읽으니까 <박하>인가 왜 <박하>라고 했는지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게 '멜랑콜리'란 걸 가지고 소설을 썼는데 멜랑콜리라는 것은 플라톤 이후에 굉장한 사상이거든.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진 내가 모르지만은, 글 쓴다는 거 여기에 전부를 다 걸고 있는 사람 같애... 안 그러면 그렇게 쓸 수 없을것 같애."
김윤식 선생이 죽은 이후, 그의 서재를 찍은 한겨레tv의 [그작가 그공간] 영상을 봤다. 김윤식은 허수경 시인의 <박하>를 두고 "글 쓴다는 것에 전부를 다 걸고 있다"고 평한다. 호기심이 동해서 읽었다. 솔직히 나는 허수경의 소설은 처음 읽어본다.
허수경은 <박하>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한다. 노트에 기록된 조선인 독일 입양자로서 1901년 고대도시 하남을 찾으러 간 이무의 이야기, 아내와 지식을 잃고서 친한 형을 찾아간 이연의 이야기. 이연이 노트를 읽어나가는 방식으로 두 개의 이야기가 중첩되어 진행된다.
"나에게, 내가 이 글을 읽을 때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일 것이다"라는 말처럼 이 책은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동시에 인간은 상실을 기록하거나, 발견해내거나, 편집함으로써 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여준다. 이무는 고고학자이며, 독일에 거주하는 이연의 친한선배 마주니형은 이무의 노트를 번역했고, 이연은 직업이 편집자다. 책의 중심이 되는 인물 셋은 결국 이야기를 만들고, 전파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박하> 가 우리는 왜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대도시의 이름이자 이무가 사랑하는 여자인 '하남'에게서 난다는 '박하향'은 내게 '멜랑콜리'의 기표처럼 느껴졌다. 실체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끌리는 것, 유혹적인 것,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어떤것이 바로 '박하향'이다. 이끌리고 천착하고, 그럼에도 종국에 잃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써서 기록한다. 김윤식이 '글 쓰기에 전부를 다 걸고 있다'고 느낀 것은 아마도 이 책이 허수경의 '문학론'이 잘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독일에서 고고학을 배운 이방인의 '뿌리가 없는' 고독과 정처없음, 그것들로 허수경은 글을 썼다.
사실 <박하>는 '국제공용어를 목표로 만들어진 인공어 '에스페란토어'를 소재로 만든 윤상의 'ni Volas Interparoli'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정취가 비슷하다. 폴란드의 안과의사 자멘호프 박사는 19세기 후반 인종간 소통의 문제가 발생하고, 약소국에게 강대국의 언어가 강요되는 현실을 걱정하며 에스페란토어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나치는 에스페란토어를 탄압하며 이를 쓰는 사람들을 잡아갔다. 심지어 그의 세 자녀들을 모조리 죽였다 (자멘호프는 유대인이다). 그럼에도 자멘호프의 손자는 탈출했으며, 여전히 전세계에서 200만명이 에스페란토어로 대화할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의 흔적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쓸쓸하게 무너져가는 삶들과 감정, 그럼에도 인간들은 버텨내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 글을 쓸 것이다. 노트나 책으로 남길 것이다. 페르난두 페소아가 그랬듯, 허수경이 그랬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