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
당신이 쓴 <페미니스트>라는 곡은 잘 들었습니다.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선언에서 당당함보다는, 억울함이 느껴졌습니다. 한 두번 '여혐'이라고 비난을 들으신 게 아닐테니까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저는 유독 당신을 비롯한 수많은 남성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이 부분 가사에 눈길이 가더군요.
"나도 할말 많아 남자도 /유교사상 가부장제 엄연한 피해자야 근데 왜/ 이걸 내가 만들었어? 내가 그랬어?"
제리케이씨 말대로 당신 가사에서 유일하게 맞는 부분입니다. 당신이 '가부장제'를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또 남성 역시 가부장제로 인해 고통을 겪었고, 희생당해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가부장제는 '남성이 지배하는 가족 혹은 사회 체제'를 의미하는데 그 체제에서 지배자인 남성이 피지배자인 여성보다 더 큰 고통을 겪진 않았을 겁니다. 또 당신이 만들진 않았지만, 당신이 그 체제를 공고히하며 '재생산'하는데 기여했을 수도 있죠.
아니라고요? 물론 스스로도 어떤 행동이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것인지, 여성혐오를 하는것인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지금껏 그런 행동과 말들이 사회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용인되어왔으니까요. 아마 당신의 음악 인생은 '메갈리아'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평온했을 겁니다. 당신은 잘 나가는 래퍼였고, 어떤 가사를 써도 사람들이 환호해줬잖아요. 그런데 '불평등'을 외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당신의 지위도 위협받았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분노가 당신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해서, 그 분노가 '망상'은 아닙니다. 당신이 쓴 가사를 뒤집자면 'Blame System, Not Women'이죠. 억울하다고 여성들을 공격하기 전에,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되어왔는지 고민하길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요? 그래서 저는 당신이 문화비평가 최태섭씨가 쓴 <한국 남자>라는 책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혹시 읽게 되신다면 먼저 253p~263p를 읽어주세요. 당신이 감히 'fake fact'라고 지적한 '성별 임금격차'가 이미 수많은 통계에 의해 '온전한 팩트'로 입증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겁니다.
<한국, 남자>는 '남성성'에 대해 탐구하고, 왜 한국남자들이 '억울해졌는지'에 대해서 다룹니다. '가부장제' 이야기를 하셨으니 말인데, 이 책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한국남성들은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이라는 가부장제의 헤게모니를 구현해낸 적이 없습니다. 국가가 요구하는 '전쟁'에 의해, '군대'에 의해, '경제위기'에 의해 남성성은 끊임없이 훼손됐습니다.
그럼에도 국가는 가족주의를 통해 '일꾼'으로서의 가장 모델을 끊임없이 호명하고, 여성은 호주제 등을 통해 '가부장제 가족'에 종속되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가족의 여성 구성원들은 '중산층가족 성공서사'의 실현을 위해 가사는 물론 공장 노동을 하며 남성 구성원에게 자원을 '몰빵'하는데 동참해야 했죠. 물론 30년이 넘는 독재정권 하에서 국가와 권력자를 향해야할 불만이 약자인 여성들에게 향하도록 '계획'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남성들이 여성을 제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온전치 않은 남성성을 여성의 희생위에 겉으로나마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당신도 가사에서 언급한 '역차별론'은 99년 헌재의 군 가산점 위헌 결정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 남성들에게 군대는 '집단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200p)를 입힙니다. 하지만 그 고통에 대한 비난이 왜 여성을 향해야 합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Blame System, Not Women' 입니다. 저자는 군 복무 개선, '인권 병영'에 반대하는 주축은 '예비역'이라고 지적하며, 군대를 개선해야 '남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2000년대부터 활성화된 온라인 공간은 '좌절된 남성성'을 표출하는 공간이 됐습니다. 호주제 폐지를 비롯해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자 남성들은 '좌절된 남성성'을 '소비하는 여성', '주체적인 여성'에 대한 비난으로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된장녀', '김치녀' 서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더불어 책에서는 간략하게 언급됐지만 여성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디지털성범죄 영상'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여성을 비난하고 도구화한 남성들은 2015년 메갈리아의 등장에 멈칫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더 이상 남성이 안온하게 '남성 권위의 회복'을 기원하며 '피해자 되기'에 몰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 책은 지적합니다.
"여성 혐오는 청년 남성들의 놀이 문화의 일부분인 것이다. 메갈리아가 나타나 그것에 상처받아왔던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전까지 그 여성 혐오의 온실은 평화로웠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그 균열을 부정하기 위해 더 조직적이고 가열찬 여성혐오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252p)
당신의 '억울한 감정'에 대해 이 책은 객관적으로 조명할 것입니다. 아마 읽어보면 여성들의 분노도 조금은 더 이해가 될 겁니다. 물론 '메갈 책'이라며 읽다가 던져버릴수도, 보고 나서도 여전히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 시도하는것만큼 의미있는 일은 또 없으리라 믿습니다.
부디 읽어주세요. 그리고 책 말미에 나오는 "어디로 갈 것인가 형제여?"라는 말에 답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역사 속에서 당신이 '퇴행'의 페이지에 기록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맨박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남자의 탄생> 등등 비교적 어렵지 않게 당신과 한국 사회의 남성성을 고찰해볼 수 있는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한 권 정도는 기꺼이 더 읽어주시리라 믿습니다.
(+) 새벽(19일 오전 4시경)에 해명문을 올리셨더군요. 곡의 화자는 '나'가 아니며, 겉은 페미니스트지만 알고보면 앞뒤도 안 맞는 남성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곡을 썼다고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제 추천은 유효할 것 같습니다. 당신은 제리케이씨에 대한 디스곡<6.9>와 해명문에서도 기어코 "메갈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시더군요. 디스곡에서 "메갈은 뭐만 해도 남자가 여자를 공격하고 있다며 거짓선동"한다고 쓴 가사 내용은 본인의 생각이 맞는듯 하네요.
그런데 대체 메갈이 누구인가요? 정상/메갈로 분류해놓으면서 당신은 '올바른 페미니즘'의 지지자이며, 분노하고 자신을 공격하는 여성들은 '일베'와 같다고 말하는 것, 너무 큰 오만 아닐까요? 메갈리아의 탄생을 이해하지 못하면 현재의 한국 페미니즘 조류는 물론, 그 자장안에서 비로소 제 목소리를 가질 수 있었던 여성들의 입장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당신이 비난받는 이유도 깨달을 수 없겠죠.
부탁드리건대 억울함은 내려놓으시고, 이번 기회에 변화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