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들의 당나귀 귀>, TV 볼 때마다 왠지 '불편한' 이들을 위한 책
성공한 로맨스 드라마의 남자주인공은 사회의 '멋진 남자상'으로 떠오르곤 한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멋지고 잘난 남자친구' 맡은 남성 배우들은 사실은 '데이트폭력범'을 연기해서 스타가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2002년 SBS 방영작인 <파리의 연인>에서 박신양(한기주 역)은 연인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고 소리를 지르며, 자기 멋대로 키스를 한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여자에게 접근했다는 이유만으로 주먹을 날린다. 2006년 KBS 방영작인 <꽃보다 남자>에서 이민호(구준표 역)는 극중에서 연인도 아닌 상황에서 구혜선의 멱살을 잡다가 갑자기 키스를 시도한다.
예전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2016년 tvn 방영작인 <또 오해영>에서 에릭(박도경 역)은 손목을 끌고 식당을 나가고, 서현진이 차 안에 있는 상태에서 앞 유리를 주먹으로 깨고, 벽에 밀어넣고 키스를 한다. 2016년 KBS2에서 방영된 <함부로 애틋하게>의 김우빈(신준영 역)은 난폭운전을 해서 수지를 위협하고, 어느 바닷가에서 멱살을 잡고 심지어 발로 차기까지 한다. 데이트 강간을 연상하는 씬까지 나온다. 최악 중 최악은 2016~2017년 SBS에서 방영된 <우리 갑순이>에서 송재림이 연기한 갑돌이 캐릭터다. 그는 헤어진 상황에서 벽에 밀어넣고 "너랑 못헤어진다"면서 추행하듯 강제 키스를 한다. 황당한 것은 이 장면이 재결합의 계기가 됐을뿐더러, 당시 SBS 공식 계정도 이에 대해 '애절한 벽 키스'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대체로 '데이트폭력 신'이 있는 드라마의 남자들은, 드라마 내내 제멋대로 굴거나 권력을 가진 혹은 집착이나 소유욕이 강한 캐릭터를 연기한다. 그리고 '로맨스 드라마'인만큼 이 남자들은 굉장히 멋지고, 매력적이게 그려진다. 겉으로는 나빠보이지만 나에게는 잘해주는, 거칠지만 마음은 여린, 다듬어지지 않은 왕자님같은 존재로 말이다.
수 십 년동안 미디어에서 폭력을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해왔는데, 그것을 '드라마는 드라마뿐이다'라고 말하는 게 가딩키나 할까. 폭력적이고 무례한 남성상이 '멋진 남자'의 표상이 되고, 그런 역할을 한 이들이 스타가 되면서 현실의 남자들은 데이트폭력을 '사랑'으로 정당화할 수 있게 됐다. 여자들도 그것이 '폭력'임을 알지 못했다.
정말 다행인 것은 최근에는 젠더 폭력을 정당화하는 혹은 여성과 남성의 권력관계가 비대칭적인 로맨스를 그려내는 드라마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 tvn에서 방영된 <나의 아저씨> 논란이었다. <나의 아저씨>는 실제 나이차가 18살 나는 두 주인공의 로맨스적 요소, 애정과 집착이 폭력으로 표현되는 장면, 중년 남성들의 자기연민과 판타지 등등이 비판받았다. 이 논란은 페미니즘이 드라마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을 변화시켰고, 제작자들이 기존의 성불평등적 서사를 반복할 경우 큰 반발에 부딪힐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물론 대중문화의 페미니즘적 비평이 확산된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일은 아니었다.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끊임없이 목소리를 냈다. 특히 한국여성노동자회의 팟캐스트 <을들의 당나귀 귀>는 2016년부터 '대중문화와 젠더'라는 주제로 예능과 드라마·영화 등이 얼마나 남성중심적인지, 또 여성은 그 안에서 어떤식으로 배제되고 차별받고 있는지를 지적해왔다. 어딘가 불편하지만 말하기는 어려웠던 미디어의 여성혐오적 요소를 지적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해준 셈이다.
지난 3월에 출간된 책 <을들의 당나귀 귀 (아래 을당>은 지금까지 팟캐스트를 통해 페미니스트들이 한국 대중문화에 던진 문제의식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낸 것이다. 2016년~2017년 방송 분중 11편을 선별하여 현재 시점에서 보완했다. '페미니스트를 위한 대중문화 실전 가이드'라는 부제에 알맞게 '성평등' 관점에서 대중문화를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읽어봐야 할 책이다. 왠지 모르게 불편한데 왜 불편한지 모르겠을 때, 또는 어떤 장면이 성차별적인지 아닌지 판단이 어려울 때, 이 책이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앞서는 드라마 이야기를 했지만, 이 책이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은 한국 예능이다. 드라마보다 더 '리얼리티'가 강조되고 젊은 층의 소비가 높은 가운데, 한국 예능은 드라마보다 '여성혐오'를 보편화하고 재생산하는데 더 크게 기여한다. 주요 출연자 혹은 진행자가 남성인 상황에서 여성은 배제되거나 '러브라인'의 도구, 혹은 '보조'나 '꽃'의 역할을 주로 수행하는 예능들이 상당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성이 주요 출연자인 경우에는 이를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에 맞춰 여성을 배열한다. <프로듀스 101> 1편을 만든 PD(지금은 YG로 갔다)는 “남자들에게 건전한 야동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프로듀스 101을 만들었다고 해서 대중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어떤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야, 그거TV에도 나왔잖아' 하면 '믿을 만한 일'이 되어 버리죠. 그것이 진실이고 사실일 거라는 생각 말이에요. <아는 형님>을 보면서 저는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을 함부로 대하는 걸 본 사람들이 'TV에서도 그렇게 하는데'라며 권력을 부여할까봐 섬뜩했어요."<한남 엔터테인먼트, 27p>
또 <을당>에서는 얼핏보면 '무해하다'고 여겨졌던, '딸 바보' 캐릭터를 내세운 아빠 예능 역시 가부장 판타지를 유지시키는 동시에, "여성의 노동과 자리는 비가시화"한다고 지적한다.
"'딸바보'는 사실상 딸을 여자로 대상화해서 '여자는 일찍 다녀야 하고, 술 먹으면 안 되고, 연애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계속 감시의 대상으로 놓는 거죠. 동시에 아버지는 그 딸의 연애나 섹슈얼리티를 통제할 수 있는 인물로 남는 것이고요."<딸바보 시대의 여성혐오 92p>
최근 내가 불편하다고 생각한 예능은 <백종원의 골목식당>이다. <골목식당>은 소위 '한남예능'이나 '아재예능' 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프로그램 속에서 조보아의 역할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조보아는 프로그램에서 맛없는 음식 감별사이자, 친절의 대명사이며, 사장들을 감정적으로 위무하는 역할까지 한다. 특히 이 '감정적 위무'가 왜 조보아의 역할이어야 하는지는 매번 의문이었다. 남성 사장들이 조보아가 가면 갑자기 '헬렐레'하면서, 마음 속에 있는 고민을 털어놓든가 피드백에 적극적으로 반응한다든가 하는걸 보여주는 게 불쾌했다.
그런 일은 사회에서 여성에게 주로 바라는 '돌봄'에 가까운 행위 아닌가. 굉장히 손이 빠르고 친절함이 몸에 밴 조보아의 모습은 <골목식당>같은 예능에서는 엄청난 장점인데, 이것이 '서빙 요정'식의 보조적 이미지로만 소비되고 있었다. 특별히 의도한 게 아니라, 중년 남성이 이끄는 예능에서 젊은 여성을 소비하는 매우 관습적인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어떤 분이 쪽지로 링크를 하나 보내주셨다. 보니까 남초 커뮤니티에서 조보아씨가 나오는 한 장면을 링크하고 성희롱에 가까운 ‘드립’을 치고 있었다. 시대가 변했는데 아직도 그들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지지 않은듯 했다. <골목식당>에서 조보아의 외모나 여성스러운 측면에 과도하게 집중한 것의 문제점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심지어 조보아의 뒤를 이어 <골목식당>에 합류한 정인선은 골목식당 프로그램 대표 이미지에서 백종원의 팔뚝을 양손으로 잡고 있다. 반면 김성주는 몸을 비스듬히 돌려서 백종원과 마찬가지로 팔짱을 끼고 있다. 예전 이미지는 김성주와 백종원 모두 백종원의 팔뚝을 잡고 있었다. 사소한 것 같지만, 그간 조보아에게 주어진 역할을 볼때 사소하게 넘어갈 수만은 없는 지점이다. SBS는 이렇듯 수년간 '백종원 예능'을 이어가고 있는데, <백종원의 3대천왕> 역시 젊은 여성을 보조적이고 부수적인 '재미 요소'로 삼는 '관성적' 행태를 보여줬다고 <을당>은 지적한다.
"여자들이 어렵게 기회를 잡아 예능에 출연해서 뭔가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때 이 사람들이 그 프로그램 안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보는 너무 힘들어요(...) (백종원의 3대 천왕이) 어느 순간 걸그룹 멤버들을 방청석에 앉혀놓고 개인기 봐라, 애교 부려 봐라, 하면 음식 먹게 해줄게, 하면서 재미가 없어졌어요. 여성 연예인들을 그야말로 꽃 병풍처럼 앉혀놓는 거죠." <아재 엔터테인먼트 58p)
물론 <을당>이 이처럼 송곳같은 '비판'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중심 예능판을 뒤집은 '김숙' 현상을 조명하고, 그의 캐릭터가 기존의 공고한 틀을 부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후 여성 코미디언들이 예능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긍정적인 상황까지 덧붙인다. <드라마 속 일하는 여성을 찾아라>는 파트에서는 서숙향 작가의 작품에서 공효진이 연기했던 '주체적 캐릭터'를 재조명하고, 직장이나 집에서 저항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N포 세대 캐릭터'들이 늘어나고 있는 '경향'을 분석한다. 영화 부문에서도 <원더우먼>, <아가씨>, <비밀은 없다> 등의 여성 서사의 한계와 가능성을 조명하며 <미쓰백> 상영 운동 등 대중의 변화에도 주목한다.
사실 <을당>은 남자들도 많이 봤으면 하는 책이다. 대화체라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뿐더러, 상대적으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주제인 대중문화에 대해 다뤘기 때문이다. <을당>은 대중문화의 남성 기득권 구조를 새삼 깨닫게 해줄 것이다. 동시에 이에 대한 비판을 '프로불편러'라고 조롱하는 게 왜 부당한지에 대한 논리적인 답을 제공한다.
지금껏 주류 남성들은 미디어에 대한 여성들의 문제 제기를 언제나 "너무 예민한 거 아냐"는 식으로 치부해왔다. 논리 없는 '감정'에 의존한 불평불만식으로 여겼다. 그러나 <을당>은 젠더적 관점의 비평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만들며, 주류사회가 '사소하다'고 여겨온 지적들이 사실은 '여성혐오 현상'의 본질에 가닿아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풀어낸다 .즉 여성들이 기죽지 말고, 확신을 갖고 자신의 목소리를 더더욱 내도 괜찮다는 것을 입증하는 책이다.
지상파나 케이블에서 만드는 드라마나, 예능 영화 등등에 대해 우리는 더욱 엄격하게 젠더적 관점을 들이대도 '괜찮다'. 유튜브 시대라서 문제없다? 천만에. 유튜브에 올라오는 상당수의 것들은 현재 지상파나 케이블 채널의 영상을 기반으로 한다. 대형 콘텐츠 제작자들이 성평등 관점을 갖고 콘텐츠를 만들면, 그것이 스탠다드가 되어 유튜브 개인 방송을 하는 이들도 함부로 '여성혐오'적 코드를 답습할 수 없다.
아무쪼록 <을당>에서 담아낸 이야기가 널리 퍼져나가, '주체적인 여성상'을 제시하고 고정된 성역할을 전복시키는 콘텐츠들이 많이 탄생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