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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Feb 08. 2020

'남페미'란 무엇인가?

나는 가부장제가 만든 '성별이분법'의 고착화에 기여하고 있지는 않은가

1. 수많은 곳에서 나는 '남성 페미니스트' 혹은 '남페미'로 호명된다. 이는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렇다. 내가 남성이라서, 남성의 입장에서 페미니즘 수용을 이야기하므로 더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지는 게 있다. 한마디로 발화자인 내가 여성일 경우, 내가 했던 이야기는 많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구조적인) 가해자는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나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남성 기득권 구조 안에서 평온했던 남성들이 여성과 동일한 분노를 가질 리 없다. 남성들의 페미니스트 선언은 '성평등'이라는 당위에 기반한 수준이거나, 시혜적일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나아가 여성혐오나 안티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진보 남성'들의 비판 내지 조롱은 계몽·교조적이거나 다른 남성과 나를 분리하는 수단에 그칠 뿐이었다.


나는 남성이 성찰하지 않는 태도로 페미니즘을 이야기한다는 게 가능한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안에 대해서 쓰더라도 나와 내 주변 남성들의 과거 이야기를 끊임없이, 의도적으로 집어 넣었다. 남성들이 그동안 관습적으로 해오던 말과 행동들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반성하는, 일종의 '전향' 혹은 '개심'의 과정을 거쳐야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책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은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남성이라는 성별 정체성을 가진 당신은, 반성의 과정을 경유해서 페미니즘을 수용해야 한다.'


이 때문에 책의 내용은 '속죄하라', '닥치고 있어라', '남성 집단을 향해서만 비판하라' 등의 메시지와 거리가 멀지만, 결과적으로 그러한 메시지를 담은게 아니냐는 오해를 낳을 수도 있는 부분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책은 주로 이성애자 남성 (시스젠더 헤테로)의 페미니즘 수용에 대해서 다루면서, 성별이분법을 강화하고 가해자-피해자 구도를 단순화시키는 데 기여할 여지가 있다. 이 점은 나의 메시지가 갖는 가장 큰 한계다.

주류적인 성정체성을 가진 남성들의 변화를 촉구하는 글들에 많은 사람들이 '속시원하고', '고맙고', 심지어 '기특하다'고 말한다. 이는 내가 안정적인 '정상성'의 틀 안에서 말해왔는지 증명해준다. 나는 줄곧 방법론적으로 남성 주체를 앞세우며, 성별을 규정짓고 성별 규범에 따라 통제하는 가부장제 구조와 타협해왔다. 능력의 부족이기도 하고,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에 매몰되어서일 수도 있다만, 변명의 여지가 없다.


2. <젠더와 문화> 12권 2호에 실은 손희정 평론가의 <어디로 갈 것인가, 형제여>라는 비평은 <한국, 남자>,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이라는 책 세 권을 통해 소위 '남페미' 담론 네트워크에 대해 언급한다. 소위 '남페미 서사'의 의미와 한계를 짚은 이 비평은 내겐 굉장히 큰 도움이자 격려가 됐다.


손 평론가는 "현재의 남페미 서사가 '반성과 개심'을 내세우며 새로운 남성성의 형성에 일조하고 있다는 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나, 페미니즘 담론 안에서의 '안전한 선'을 지키려고 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동시에 다양한 페미니즘의 흐름을 남페미 서사 안에서 '단일화'하는 오류를 범할 위험이 있다는 우려도 나타낸다.


사실 내 책의 주된 논의는 현재 페미니즘 공론장에서는 거의 이견이 없는 내용들이다. 다만 그 안에 '남성의 행동'이라는 디테일을 추가해서, 사안 하나하나를 남성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구체화시킨 것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서술은 근본적으로 남성의 페미니즘 수용 방식은 물론, 페미니즘 공론장에서 남성의 역할을 한정 짓는다는 한계가 있다.


특히 나의 '반성론'은 남성문화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거나 이탈한 이들에게는 잘 들어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또 사회적으로 남성으로 간주되나, 젠더가 '비남성'인 이들에게도 통용되지 않는다. '남페미 서사'는 여성과 평등한 관계를 맺는 남성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페미니즘의 자장 안에서 남성의 '올바른 모델'을 한정짓기에 바쁘다. 이는 '안전한' 성별이분법 을 근거로 한 또다른 '성역할'을 부여하는 행위로 볼 수도 있다. 아래 손 평론가의 비평을 인용한다.


"다양했을 것이 분명한 ‘성찰/들’이 대동소이한 과정을따라 ‘조신한남자’라는 하나의 결과로 귀결되는것은 역시 이상한 일이다. 시스젠더 헤테로남성(으로상상되는남성)성과 페미니즘이 만나는길이 단 하나일뿐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인간을 생물학적차이에 기반하여 두 개의 성별로 나눌 수 있다는 믿음체계인 ‘성차(sex)’ 자체에 도전해온 페미니즘 담론 안에서‘남페미’와‘(여)페미’를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초래되는 효과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어진다."


"남페미서사는 지금/여기에서 페미니즘이 무엇인가 혹은 무엇일 수 있는가를 상상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페미니즘을 여성의문제로 국한하여 조신한 남페미를 생산하는 것을 넘어서서 더 급진적인 페미니즘을 말할 수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는 함께 성별 이원제의 젠더매트릭스를 깨자는 적극적인 연대에 대한 요청이다. 그 과정에서 ‘남성작가’들이무엇을기꺼이 ‘포기’(책 <남성성들>에서 전유한 개념)할지는 각 저자의 몫일 것이다."


이와 같은 손 평론가의 지적은 현재의 '남페미' 서사, 또 이에 부응하는 내 책에 부재한 내용들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내 글에는 대체로 아래와 같은 질문과 논의가 빠져 있다.


여성을 오직 성애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남성문화가 잘못됐다는 주장은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한 '이성애 규범'에서 탈피하자는 이야기와도 맞닿는다. 그러나 '남페미 서사'는 여성과 관계를 '평등하게' 맺자고 했을뿐, 그 이상의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과 같은 책은 남성을 고정불변의 성별 정체성으로 놓고, 그들에게 페미니즘적 실천을 요구하고 있지만, 실상 젠더는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다양한 젠더에 기반한 다양한 페미니즘 실천에 대한 논의의 장을 축소시키는 부작용을 낳는 것은 아닐까?


 기존의 남성성을 깨는 행위를 요구하면서, 이를 수행하는 남성들이 '젠더 질서 재편'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이들은 고정된 성적 차이가 있다는 관념을 깨부수고, '여성차별'의 근거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남페미 서사'는 생물학적 특징으로 인해 '남성'으로 규정되어온 이들의 관습과 문화를 건드리는 일. 그런데 '남페미 서사'는 고정된 틀 속에서의 페미니즘 수행을 전제로 '남성성'의 변화만을 이야기할뿐이다. 이는 과거의 '잘못된 남성성'에 대한 반성과 개심에 기반하므로, 타협적일수밖에 없다. 아예 성역할을 바꿔버리거나 거부하는 모델은 제시되지 않았다.


변희수 하사의 전역, 트랜스젠더의 숙명여대 입학 포기 등과 관련한 '혐오' 현상을 보고 화도 나고, 놀라기도 했다. 동시에 페미니즘을 말하는 남성들이 본의와 다르게, '혐오 구조'를 강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정성별 남성이, 지정성별 남성에게 페미니즘의 실천방법을 권유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성별이분법 체계에 기댈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페미'의 '남'을 어떻게 넘어서고, 깰 수 있을지는 이제 내게 또 하나의 과제가 됐다. 눈 앞의 가부장적 남성문화에 맞서 싸우면서도,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할 지점이다.


"성별 이원제의 젠더매트릭스를 깨자"는 손 평론가의 말을 항상 유념하겠다. 적극적으로 연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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