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정리를 하다가 예전 폰에 남아있던 문자들 보게 되어 저녁시간을 다 써버렸다. (오늘은 일찍 자려고 했는데…)
해외 생활을 막 시작할 즈음의 문자들이라 아주 영어가 가관이다. 그마저도 바로바로 못 보내고 사전 찾아보며 보낸 문장들이었지.
여전히 배우고 공부하는 중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벗어난, 머리 노랗고 눈 파란 사람들 앞에서 입이 얼어붙거나 내 말을 한 번에 못 알아들은 듯한 표정에 죄책감이 드는 시기들을 어떻게 지나 보냈는지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영어 공부를 하는 것보다 일단 문밖을 나가면 영어를 써야 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이점이긴 하다. 한 문장이라도 그날 영화나 책에서 본 것을 바로 써먹을 수 있으니까.
내가 범죄 수사물이나 법정 드라마, 미스터리 등을 좋아해서 배운 영어들이 좀 살벌하다는 것 빼고는…
그보다는 좀 더 밝고 맑은 버전으로 내가 영어를 늘리기에 자주 애용했던 방법은 ‘아는 얘기 물어보는 것’이었다. 대화를 하려면 질문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초창기에 ‘영어를 써보겠다’ 결심하고 야심 차게 질문을 뱉어 놓고 나서 들려오는 대답을 이해하지 못해 “Ah.. ok” 하곤 대충 멋쩍게 웃어넘기며 질문 한 번에 대화를 급하게 마무리했던 기억들이 있다. 처음 자막 없이 영화를 볼 때, 범인이 '쟤' 인건 알았는데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못 알아들었던 그때와 비슷한 시기였다.
그래서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답을 아는 얘기들을 묻기 시작했다. 그러면 적어도 그들의 대답을 예상할 수 있으니 그다음의 내 리액션과 다음 질문까지는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말부터 호텔 프로모션이 바뀐다는 내용을 전해 들으면 다른 동료한테 가서
“이번 주 black board special은 뭐야?”라고 물으면서
“브라질식 요리래”
“그거 작년에 한 거랑 같은 거임?”
“메뉴가 바뀐 듯.”
이런 식으로 아는 내용을 토대로 대화를 하다 보면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른 사용 어휘 등도 알게 되고 무엇보다 대화를 이어나가기 수월하다. 그래서 사실 요즘도 대화를 하고자 할 때 얘기 거리가 없으면 공부도 할 겸해서 쓰는 방법 중에 하나.
이 방법을 쓸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 있다.
수능을 막 치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는데 그 곳에서 같이 일하는 여자들한테는 비호감이었는데 남자들에게는 유독 인기가 많은 언니 한 명이 있었다.
(비호감인 이유가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서는 아니었다는 걸 미리 말해두고… 비호감이긴 했어도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닌 뭐 그런 애매한 관계… 나만 있는 거 아니죠? )
당연히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는 아니었고, 또 대단히 특징이 강한 성격도 아니었다. 다만 항상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었고 목소리가 상냥했다는 정도? 근데 막 남자 동료들이 본인의 귀중한 쉬는 시간에 굳이 나가서 그 언니한테 ‘그린티 프라푸치노’ 사다 바치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늘 궁금했었다. 그 언니에게는 어떤 매력 있었던 걸까?
근데 그 언니가 항상 남자 동료들에게 아주 뻔한, 손가락 조금만 놀리면 알아낼 질문들을 자주 하곤 했었다.
이를 테면
명동에 피자헛 어디 있는 줄 알아?
심야영화 하는 영화관 알아?
등등 말이다.
그러면 남자들이 또 뭐 대단한 학문을 끄집어낸 것처럼 우쭐대면서 대답을 해주고 그 언니는 광대가 승천할 듯한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척척박사’라고 추켜 세워줬다. 그렇게 남자동료들은 그 언니가 본인이 혹여 잘 모르는, 그러나 검색하면 1초 만에 알 수 있는 질문을 하면 친히 직접 찾아 알려주다가 같이 명동 피자헛에 가고 영화관 가서 심야영화 보고 그랬다.
그때는 ‘왜 저래…?’ 하고 넘겼던 그 언니와 남자 동료들의 언행들이 언제부턴가 이해가 너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영어회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했던 ‘내가 아는 얘기 물어보기’를 써먹을 때도 내가 상대방의 대답이 예상 가능하니 리액션이 당당하고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얘기하는 사람도 같이 장단에 맞춰 얘기하게 되어 사실 영어회화뿐만 아니라 남녀불문 친구 사귀기에도 참 괜찮을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한마디에 세상 밝은 미소로 화답하는 사람, 별 일 아닌 일에도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사람은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연애사업에 뛰어들 준비를 한 20대 완전 초반의 남자들이라면 더더욱.
그 언니가 명동에 피자헛의 위치를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언니는 눈빛만 ‘아무것도 몰라요’ 였지 사실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어쩌면 그 눈빛 마저도 다 계획에 있었던 것이었을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