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 이유
외국 생활을 하면서 좋은 점 중에 하나는 원하지 않은 인간관계는 얼마든지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처럼 죽마고우가 될 만한 사람을 만날 기회도 시간도 충분하지 않을뿐더러 한국만큼이나 이민자들 역시 다들 살기 바쁜 입장이라 언제 떠나갈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웬만해서는 쉽게 정을 잘 나누지 않는 분위기도 한몫한다.
누군가와의 인연으로 내 유년기를 설명할 필요도 없고 어떤 이와의 절연으로 내 인생의 한 부분을 가슴 아프게 도려내야 할 필요도 없으니 외국 생활 8년 동안 인간관계에 대한 집착도 미련도 사라지게 되었다.
내 주위의 모든 인간관계에 대해 회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나의 외로움을 다른 사람에게서 위안받으려 극성맞게 누군가를 찾아 헤매며 너도 나도 곁에 두려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인연이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찾게 될 테니까…
그래서 나는 연락을 잘 안 하는 사람들에게 나도 연락을 안 한다.
‘밥 한번 먹자.’에 소극적이거나, 구체적인 만남 제안에 거절 후 다시 만나려는 의도를 안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연락을 안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만나서 본인 얘기만 실컷 하고 ‘우리 잘 통한다.’ 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더 이상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다.
무슨 얘기만 하면 “나도 그래.” 라면서 본인의 힘든 얘기로 연결 지어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가로챈 내 발언권에 내 이야기의 주제는 이미 개나 줬고 자신의 어제와 딱히 다를 바 없는 불평불만에 날개를 달아 노고를 토로해댔다. 지금 내 시끄러운 속 달래기도 바쁜 나에게...
‘그래… 안 힘든 사람이 어디있겠어… 얼마나 말하고 싶었으면 저럴까…’ 하고 내 얘기를 체념한 채 한바탕 쏟아내는 얘기를 듣다 한 마디씩 거들면 또 괜찮단다.
나: “ 어딜 가나 안 맞는 사람들 꼭 있지. 그래도 매일 보려면 힘들겠네. “
그: “ 뭐 꼭 그렇게 힘든 건 아니야. “
나: “그래. 한두 번도 아니고 매일 오버타임 하면서 일하면 힘들겠다. “
그: “근데 또 하다 보면 괜찮아.”
아니 그럴 거면 징징 거리 지를 말던가, 안 괜찮은 내 이야기를 가로채지를 말던가…
그래 놓고 양심상 한 번씩 나의 안부를 묻는다.
그 토끼 꼬리만 한 그의 집중력에 얘기를 할까 말까 하다가 조심스럽게 나는 괜찮지 않다는 얘기를 최대한 집약하며 온몸으로 표현하는데도 본인의 얘기를 다 털어놓고 목표 달성을 한 그 친구의 응대는 참 한결같다.
“그래도 잘 지내고 있네.”
얼마 전에 전 직장에서 같이 일했던 한국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하는 동안 꽤 사이좋게 지냈었는데 따로 만나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가 몇 번 제안했다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길래 그 뒤로는 여지없이 나는 먼저 연락을 한다거나 뭔가를 제안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내가 그만두는 날짜가 다가오고 웬만한 동료들이 다 참석한 송별회에 그 친구는 자기와는 나중에 따로 밥 먹자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먼저 떠나기 전에 밥을 먹자고 하면서도 끝끝내 시간을 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전 직장을 떠나면서 이렇게 나를 더 이상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관계들 역시 여지없이 내 폰에서, 내 기억에서 떠나보냈다.
그러더니 7개월 만에 연락이 와서는 내가 봤었던 시험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다. 내가 공부한 자료들과 설명을 듣기 위해 두 시간을 운전해서 오겠다는 열의마저 보였다. 그러고 며칠 뒤, 예기치 않게 락다운이 되었고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이 친구는 다시 전화해 내 자료만 이메일로 전달받기를 원했다.
내가 뭐 대단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시험에 대한 아무런 조사도 없이 다짜고짜 (서론은 길었지만 결국 목적은 시험자료) 자료를 요청하는 이런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것에 감사하며 있는 것 없는 것 다 퍼주는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나도 시험을 핑계로 나를 한 번이라도 더 보겠다는 사람과 원하는 것을 얻으면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을 사람을 구분할 정도는 되었다.
오랜만의 통화에서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이 친구가 말했다.
“ 내가 안 하면 연락 진짜 안 하네?”
내가 너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 건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너와의 대화가 즐겁지 않기 때문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