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여행이라면 여행
사는 곳이 호주인지라, 거쳐온 곳이 뉴질랜드인지라 나의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상상 속의 그곳이라는 것을 잘 알겠기에…
나 역시도 남의 나라에서 사는데 바빠서 간간히 한국을 방문하는 것 외에 ‘여행’이라는 것을 계획해 본 것은 제법 오랜만이었다.
계획이라고 해봤자 날짜와 장소 선정 후 비행기 표 구매한 것이 전부인 ‘계획 같지 않은 계획’이 어떤 식으로 여행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려 각자의 여행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엇보다 나는 ‘관광’을 안 좋아해…
이번에 새삼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머리 털나고 처음으로 가보는 동네를 가게 된 것은 오랫동안 목표를 두고 달려왔던 일이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에서 나에게 보상을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한국이 아닌 새로운 곳에서의 휴가를 기획하며 결정된 곳은
워싱턴 D.C와 뉴욕.
딱히 보고 싶은 것은 없었으나 보고 싶은 사람은 있었다.
장소 선정은 철저히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보러 가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나의 베프가 있는, 10여 년 동안의 그리움을 안고 도착한
그간 지내던 곳이 복잡하고 빼곡한 서울이 아니라 한가하고 널널한 호주 여서 인지 D.C의 첫인상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옛스러운 건물들과 신식 건물의 조화와 뭔가 정돈된 듯한 거리 구성과 사람들. 특별한 점이 있다면 연방 정부 기관이 집중되어 있는 컬럼비아 특별구답게 백악관, 국회의사당은 물론이고 FBI 건물에 union station 등등 고개만 돌리면 뉴스나 미드에서 많이 듣고 보던 건물들이 가득했다.
(그곳에서 커피 한잔 하며 나랏일 하는 사람들 얘기를 훔쳐 듣고 있으면 마치 나도 국가기관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듯한 느낌.)
직장인인 친구의 피곤을 무릅쓸 정도로 내가 관광에 진심이 아니어서 뉴욕 가는 버스를 타러 간 union station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명소들은 관광객 모드를 억지로 끌어와 드라이브로 차 안에서만 관람만 했다.
입국 심사부터 살 떨린다는 미국의 이미지와 다르게 뭔가 여유롭고 평온한 기운이었지만 그래도 밤늦게는 다니지 말라는 친구의 당부.
일하는 친구부부와 학교 다니는 딸이 있는 집에서 일주일 내내 지내는 것이 미안하던 차에 버스로 4시간 정도면 뉴욕을 갈 수 있다는 말에 2박 3일 뉴욕행을 결정했다.
CSI New York으로 영어공부를 해온 터라 뉴욕은 '범죄의 도시'라는 선입견이 있어서인지 여행객 차림으로 오래 거리를 배회하는 것이 불안해서 버스터미널 근처로 숙소를 잡은 것이 최대 실수였다.
터미널과 숙소가 있던 8 avenue 가 제일 번잡하고 위험해 보이는 곳이었다. 워낙 낙후된 건물들이 많아 보수 공사로 인해 철제들이 건물들을 에워싸고 있어 어수선한 분위기 인 데다 길도 좁고 더럽고 냄새나고…
그것이 뉴욕의 첫인상이었다.
미드 가십걸 생각하고 뉴욕 패션에 뒤지지 않겠다는 일념하에 예쁜 옷에 진주 목걸이까지 하고 갔지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액세서리는 모두 다 빼버리고 가방에다 예쁜 옷은 다 고이 접어두고 2박 3일 내내 같은 옷만 입고 다녔다는 슬픈 얘기.
숙소로 오는 동안 이미 명소를 직접 눈에 담고 싶은 마음도, 맛집을 가보고 싶은 의욕도 모두 사라졌고 그냥 숙소에 콕 박혀있다가 다음날 우드버리 아울렛이나 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오지 않을 뉴욕이라고 생각하고 억지로 관광객 모드를 또다시 끌어와 센트럴 파크, 타임스퀘어등등을 꾸역꾸역 보고 왔다.
낭만이 가득한 줄 알았던 센트럴 파크는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시점이라 춥고 황량했고 청계천보다 몇 십배 많은 관광객용 마차들의 말들의 똥냄새가… 똥냄새가…
그리고 CSI New York 의 한 에피소드에서 센트럴 파크에서 시체를 발견한 그날의 날씨가 딱 이랬다고...
스산한 분위기에 쫓기듯 나왔다.
뉴욕에서 약 3년간 지내보셨던 외삼촌께서는 내가 본 뉴욕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하셨다. 조금만 여유롭게 둘러보면 의미 있고 정말 근사한 곳들이 곳곳에 있다고 하셨다. 그런 곳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떠나온 것은 아쉽지만
그 상황에서는 나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있다.
일단, 나는
겁 많은 여자 혼자였다는 것- 결국 살 떨리는 미국을 뉴욕에 내리자마자 경험하고 와인을 사서 나오면 자기 술도 사달라고, 피자 한 조각 사 먹을라치면 자기 먹을 것도 사달라며 말 거는 노숙자들까지 만나니 겁이 나서 해 떨어지기 전에 숙소에 들어가야 한다는 공포감이 생겼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니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무엇을 보고 있는지 뭘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고 발걸음만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니 뉴욕 지하철은 무서워서 생각 조차 하지 않았고 다른 대중교통들도 알아보다가 시간 다 갈 것 같아 오로지 도보로만 뉴욕시내를 돌며 6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2만 보 걸었으면 할 만큼 했다고 여기고 있다.
뉴욕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는 것- 애초에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명소들에 대한 얄팍한 정보만 있었을 뿐 뉴욕이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거나 to do list 가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부러 흥미를 만든 우드버리 아울렛과 해리포터 스토어를 제외하고는 뉴욕에 대단히 바라는 바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쇼핑을 위하여 30만 원을 환전하고 199달러를 받으며 ‘눈뜨고 10만 원 베이는 경험’을 하고 난 뒤 나는 더 이상 무엇을 사고 싶지도 심지어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결론적으로 귀국행 캐리어에 아울렛에서 구매한 할인율 80% 달하는 예쁜 코트와 미국 브랜드 가방을 담아왔으니 목적 달성은 한 셈.
이번 미국여행을 통해서 결심한 부분이 있다.
만약 내가 또 내 의지로 방미할 일이 있다면 나는 돈을 펑펑 써도 기별이 가지 않을 만큼의 재력을 가졌을 때 오리라는 것.
환율을 얕잡아 보고 와버리니 여행의 묘미인 ‘돈 쓰는 맛’을 누리지 못했고, 그놈의 tip 문화 때문에 좀 배부르게 먹을라치면 혼자서도 순식간에 100불이 넘어가버리니 미국에서 친구랑 함께하는 식사를 제외하고는 배가 부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내가 지내는 호주나 미국이나 음식에 큰 차이가 없어서 ‘그 밥에 그 나물’인 음식에 그 정도 돈을 쓰고 싶지 않기도...)
그래서 또 오게 된다면 맨해튼의 제일 화려하고 안전한 곳에 숙소를 잡고 기사 딸린 차 타고 다니면서 팁을 팍팍 주면서 맛집 다니고 쇼핑 잔뜩 하고 올 거야! (아울렛을 둘러보고 현혹되어 잠시 미국에 눌러앉을 궁리를 해 본 1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되어 찾은 미국은 다소 실망스럽긴 했지만 이번 여행에 돈이 아까웠다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호텔에서 일하면서 종종 미국손님들이 다녀갈 때면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고개를 저으면서 “so arrogant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내 입장에서 그런 동료나 손님이나 다 영어권 사람들이라 나름 자기들이 느끼는 바가 있나 보다 했었는데 이번 미국 여행을 통해서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이번에 미국 브랜드들을 본토에서 쇼핑하고 먹어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맥도널드부터 시작해서 서브 웨이, 쉑쉑버거, 스타벅스, 블루 보틀 등등 심지어 조만간 한국 입점을 준비하는 파이브가이즈에 의류, 가방 브랜드들은 수도 없이 많고 미국이 관여하지 않은 부문들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니 내가 호주의 몇 안 되는 선물할 만한브랜드인 Aesop에서 선물을 사 왔을 때, 사람들이 당연스럽게 미국 브랜드인 줄 알았다고 말할 수밖에…
건물, 육교마다 미국국기가 가득한 곳에서 본인들에겐 일상인 언어와 화폐가 세계의 기준이 되니 세상이 만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미국을 경험해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는 것도 나름 좋았지만 어쨌든, 무엇보다 10년동안 보고 싶었던 친구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누가 들어도 감탄할 만큼 비행기표를 저렴하게 잘 구했거든.
그래서 괜찮았다.
그동안 서울에서 운전할 수 있으면 세계 어디서든 운전할 수 있다고 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꼬리물기는 기본이고 신호등의 존재가 무색한 뉴욕을 경험하고 해보지도 않은 운전에 대해 말한다.
뉴욕에서 운전해보지 않았으면 말도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