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앤지 Jun 09. 2021

두 번의 워킹 홀리데이, 내가 살 곳은 내가 정한다.

내가 이성에 대한 이상형을 성립하는데 가장 먼저 일조를 하신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가깝거나 혹은 친하지 않은 가족들 중에 해외 체류와 인연이 있으신 분들이 더러 계셔서 외국 생활에 대한 로망이 내 인생에서 그다지 먼 얘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전도유망한 젊은이 까지는 아니더라도 지 앞가림이라도 차근차근했다면 그래도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 나는 그마저도 전혀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도 나에겐 사치라는 걸 느끼고 나서는 사표를 품고 다니는 회사원들처럼 해외로 뜰 마음을 늘 품은 채로 지내왔었다.




처음에는 할아버지 계셨던 미국으로 갈까, 영어의 종주국 영국으로 갈까 하며 ‘있어 보이는’ 선택을 하고자 하다가 도피성 해외 체류에 생활비를 쥐어 주실 만큼 호락호락한 가족들도 아니었고 그럴 여유가 있는 여건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나는 해외 노동자로서의 삶을 각오하고  나의 첫 도피 행선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알게 된 워킹 홀리데이, 그리고 그 어느 나라보다 당장 떠날 수 있는 호주를 선택하게 된다.



퇴직금 400만 원,
영어학원 3개월 회회 실력

으로 떠나 온 호주에서 나는 현지 3개월 어학연수를 시작으로 흔한 워홀러들과 전형적인 워홀 생활들로 2년을 채워 나갔다.  General English 코스를 들으며 일단 한국을 떠났다는 자유는 만끽하고, 돈이 다 떨어져 갈 때 즈음에 농장으로 출격, 본격적인 외국인 노동자의 삶으로 뛰어든다.

시즌에 따라 주(state)를 이동하며 딸기 농장, 망고& 라임 농장, 바나나 농장을 순회하고 당근 공장, 고기 공장까지 발 도장을 찍으며 2년을 채웠다. 호주 워홀러들은 한 회사에서 6개월 이상 일을 못하기 때문에  6개월마다 혹은 시즌마다 일을 옮기며 어줍지 않은 영어 실력이지만 친구들을 사귀고 간간히 여행하면서 지내다 보면 2년은 금방이지.


말 그대로 2년 동안의 Holiday를 위한 working을 하며 비자의 목적을 누구보다 충실히 이행하고 돌아온 나는 다들 바쁘게 사는 한국에서의 2년 공백을 채우기가 버거워졌다.

버스를 타면서 버스기사님이 일일이 나의 안녕을 물으면서 돈 받고 차 표를 끊어주는 여유 넘치는 생활을 하다가 버스 카드가 한 번에 경쾌하게 통과하지 않으면 등 뒤의 서늘함과 동시에 식은땀이 흐르는 한국 분위기도 고작 2년 만에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4년을 버티다가 워홀을 신청할 수 있는 나이의 끝물에 다다랐을 때, 나는 고민 없이 뉴질랜드로 가게 된다.  


이미 또래들은 이렇다 할 커리어를 쌓기 시작하고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는 상황이라 나의 선택에 대단한 용기라고 추켜 세워 줬지만, 사실 나에게는 생활비 손 벌일 수 없어 뭐라도 해온 일자리에서 아쉬울 커리어라곤 없었기 때문에 병원 연구소에서 비정규직으로 프로젝트에 참가하며 일해온 당시 상황에서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니 다시 구직자 신세가 되어 미련 없이 훌훌 떠나기에 적합한 시기였을 뿐이다.


하지만 뉴질랜드행은 조금 달랐다.  이미 워홀의 처참한 결과(지금 생각은 다르지만)를 맛보았고 심지어 나이는 더 먹었었기 때문에 또다시 별 소득 없는 귀향은 곧 귀양이 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이었기에 나는 어떻게 서든 눌러앉을 마음으로 안되면 '불법체류라도 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짐을 챙겼다.  

얄팍했지만 즐기면서 했던 2년의 기억은 세 달 정도였던 적응 기간을 한 달 정도로 단축시켜줬고 나는 농장이 아닌 뭔가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직장에 이력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미 숱해왔지만 매번 우울한 좌절과 초조함의 시간을 거쳐 엄마론(loan)를 요청드리기 직전에 극적으로 한 로컬 호텔에 합격소식을 듣게 된다.

뉴질랜드에서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한 회사에서 3개월 동안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3개월 뒤에 다른 일자리를 구하든지, 일하던 회사에서 스폰을 받든 지 해야 한다. 나는 당시 호텔에서 스폰 제의가 들어오긴 했었지만, 규모가 크지 않은 로컬 호텔에 묶여 일을 하기에는 더 큰 호텔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었고 다행히 비자 기간도 많이 남아있어서 (또 나름의 드라마를 경험하며) 프랑스 계열의 호텔 N으로 이직을 하여 3개월을 채 채우기도 전에 스폰 제의를 받고 본격적으로 호텔리어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관광지에서 호텔업에 종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음 직장으로 이직이 연결될 만한 경력과 인맥이 생기고 소규모 로컬 호텔에서 프랑스 계열의 4성 호텔 체인으로 그리고 나라를 옮겨 세계 최대 호텔 계열 중의 하나인 5성급 호텔로 까지 일을 하게 되는 기회가 열렸다.



그렇게 3년 반을 한 호텔에 묶여 일을 하다 보니 이제 와서 한국에 돌아가기에는 한국에서 취업적령기를 놓쳐버렸고, 이렇게 여기서 있자니 아무래도 자유롭지 않은 비자 상태가 밀린 숙제처럼 마음 한 곳을 무겁게 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간구하다 내 상황에서는 뉴질랜드보다 호주에서 시작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 호주로 다시 넘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방탄 소년단이 데뷔한 2013년에 본격 해외 생활 데뷔를 한 나는 영주권과 한걸음 한걸음 가까워지고 있다. 도망치듯 와서 빈손으로 시작했던 호주에 다시 돌아온 나는 이제- 대학교 학과별 세계랭킹에 상위권에 거론되는 호주 대학교의 학사학위도 받았고, 셰프 자격증도 있으며, 적어도 오세아니아 주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아직 시도를 안 해봐서 모름) 들이밀 수 있는 호텔 경력과 그동안 모셨던 general manger들과 각 부서 매니저들, 그리고 executive chef들의 reference (추천서)들도 가지게 되었다.  


시작은 다소 쭈글쭈글했지만,  점점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내가 지금 있어야 할 곳은 여기인 듯싶다.

한국은 여전히 너무 그립고 좋지만 나를 주눅 들게 했던 그 시간들을 생각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얻게 된 한국인에서 이제는 내가 살 곳은 내가 정하는 지구인으로 살아보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