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tacura Dec 25. 2021

번역가의 생활

그것은 글 쓰는 이들의 삶이 아니었다.

번역가로서의 첫 번역은 어스름이 해가 지는 어느 가을날 저녁, 삼각지 역 근처 한 근사한 노천카페에서 시작했다. 통대 재학 시절 동기로부터 소개받은 드라마 극본 공역이었다. 주인공이 무려 이소룡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스스로의 모습이 어찌나 흐뭇했던지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번역가의 삶이란 내가 상상했던 것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는구나. (그로부터 몇 년이나 지난 후에 들은 바지만,)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상까지 거머쥔 봉준호 감독도 주로 카페에서 글을 쓴다지. 이것이 바로 글 쓰는 이들의 삶이던가...훗!

...라고 그때는 생각했었다. 몇 년 전 운 좋게 출판 번역을 맡게 되어 480페이지짜리 비즈니스 서적을 번역한 적이 있었다. 출판사는 초짜 번역사에게 두 달 안에 번역해 줄 것을 요구했다. 사실 내가 어느 정도 할 수 있을지 가늠도 하지 못하는 때였다.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그러마 하고 조건을 덥석 받았다. 그리고 이어진 두 달은 폐인의 모습을 한 번역 기계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번역은 납기가 생명이라는 생각이 본능처럼 들어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일정에 맞춰 분량을 정했다. 매우 당연하게도 그 분량은 매일 조금씩 뒤로 밀렸고, 하루 작업량은 조금씩 늘어갔다. 남편 출근 후 퇴근할 때까지 조용한 낮 시간 에서 낮은 음악을 틀어 놓고, 커피나 차를 마시며 여유 있게 작업을 하겠노라, 저녁은 열심히 하루 일과를 마친 부부가 마주 앉아 맥주 한 잔 마시며 스트레스도 풀겠노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 번역 속도에 작업 시간 두 달은 턱없이 촉박했다. 매일 새벽 1~2시까지 번역을 해도 조금씩 뒤로 밀리는 분량을 채울 수가 없었다. 당초 작업 일정에서 제외했던 주말을 다 끌어다 써도 겨우 중간 납기 일정을 맞출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황이었다. 번역이라는 게 퇴고를 할수록 품질이 높아지는데, 퇴고를 한 번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불안해졌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도 안 하고 시작한 번역 밥도 대충 때우고, 새벽에 잠이 와 지 쓰러질 때까지 이어졌다. 중간에 리듬이 끊기면 다시 복귀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면서 밥 하는 시간은 아까워서 항상 간단하게 허기만 채우거나 대충 때웠다. 잠이 부족하고, 밥이 부실하니 삶의 질도 낮아졌다. 납기까지 두 달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땐 초짜 번역사라 일정을 효율적으로 조정할 줄도 몰랐고, 번역 속도도 꽤 느렸다. 지금이라면 그때보다는 즐기면서 할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납기까지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며 작업을 하는 경우는 지금도 왕왕 있다. 에이전시에서 애초에 번역 납기를 촉박하게 잡아주는 경우도 있고, 다른 작업과 일정이 조금씩 겹쳐서 작업 시간이 부족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엔 별 수 없다. 잠을 줄이고, 밥 먹는 시간이라도 줄여서 납기를 맞추는 수밖에. 번역 일감이라는 게 순서대로 내게 와 주는 것이 아니니 번역가의 삶이라는 게 구조적으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주는 샘플 번역 한 건 외에는 작업이 없었다. 거의 순수하게 전업주부로서의 한 주를 보냈다. 일이 없는 주는 집안의 청 상태와 식탁 위 반찬 수준이 달라진다. 남편은 그것들로 내가 작업을 하고 있는지, 쉬고 있는지를 알아챈다. 다음 주엔 예정되어 있는 급행건이 있다. 그 바쁜 일정 중간에 대학 동창들을 몇 달 만에 만나기로 되어 있어서 작업 시간은 더 부족하고 더 바쁠 예정이다. 그렇게 폭풍 같은 한 주를 보내면 2022년이다.

통대 졸업 후 프리랜서 통번역사로서의 첫 해가 시작된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 죽지 말고 나랑 같이 살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