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거와 많이 다른 일본-7>>
2001년 GO라는 영화에서 인상적인 데뷔를 하고 나서 승승장구, 일본 최고의 연기파 배우 중 한 명으로 꼽는데 주저하는 이는 거의 없을 듯하다. 아라이 히로후미는 그만의 특별한 표정과 분위기로, 앞으로도 보여줄 게 무궁무진한 그런 배우로 기대돼 왔다.
저 북쪽 시골인 아오모리에서 19살에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도쿄로 올라온 뒤 바닥에서부터 최고의 위치에 오른 드라마 같은 인생 스토리도 그의 이미지를 특별하게 해주고 있었다. 자신의 지금 위치가 얼마나 소중한 지 누구보다 본인 스스로 잘 알 거라는 의미다.
이제 40살,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고 지금까지 이룬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룰 것으로 기대된, 앞길이 훤히 뚫려있는 아라이 히로후미는, 그러나 충격적인 방식으로 추락했다.
자신의 집으로 부른 30대 여성 출장 마사지사를 성폭행한 혐의로 지난 2월 경찰에 체포됐다. 아라이는 합의된 성관계였다고 주장했지만 경찰은 힘으로 여성을 제압한 뒤 강제로 성폭행했다고 밝혔다. 여성은 피해 직후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이후의 파장은 누구나 예상하는 그대로다.
소속 사무소는 아라이와 계약을 해지했고, 이미 촬영이 끝난 영화는 개봉이 무기 연기됐으며, 그에겐 거액의 소송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가 그동안 어렵게 쌓아온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고, 앞으로 더 무너질 것이라는 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상황이다.
이렇게 충격적이고 어리석은 범죄를 저지르다니... 평소 부드럽고 친절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이면이 그에게 있었던가, 사람들은 당황했다. 아라이는 보석금 500만 엔을 내고 석방돼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재판 과정에서 반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의 부활은 거의 절망적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벌어진 이후, “도대체 그가 왜?”라는 의문과 함께 또 하나 사람들의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대목이 생겼다.
그의 국적이 한국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식적으로 공개된 것이다. 사건 당시 주요 언론들은 이렇게 보도했다.
“도쿄 세타가야구에 거주하는 배우 아라이 히로후미 (본명 박경배, 한국 국적)를 성폭행 혐의로 경찰이 체포했다."
그렇다. 그는 박경배, 국적이 한국인 재일교포 3세였다.
인터넷상에서 이른바 넷우익들이 “역시 한국인들은 성폭행이 흔하다”는 등 한국에 대한 비난의 소재로 이용하며, 독설과 매도가 난무하고 있다. 그들의 그런 반응은 충분히 예견 가능했던 것이긴 하지만, 일본 사회의 태도와 방식에 근본적인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자이니치는 한국 이름인 본명과 일본식 이름인 통명이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본 사회에서 차별을 피하기 위해, 또 일상의 불편을 피하기 위해서인 만큼 두 개의 이름은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과 배제가 낳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그의 파렴치한 범죄는 범죄이고, 가만히 자이니치들의 삶을 생각해본다. 자이니치 3세 박경배는 하여튼 일본 사회에서 나서 자라고 성공하고 추락한 인물이다. 뿌리가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속 깊이 있을 수 있지만, 그는 사실상 그리고 현실적으로 ’일본인’으로 살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가장 명백하고 결정적인 ‘팩트’다.
그는 일상에서 한국 국적임을 '굳이 적극적으로' 드러낼 이유도 필요도 맥락도 없었고(그렇다고 그가 한국 국적을 숨겼다는 의미는 아니다), 무엇보다 일본 사회가 그의 한국 국적을 주목하거나 부각하거나 강조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본질이고 핵심이다. 그의 국적이 어디고 본명이 무엇이든 간에 일본 사회는 아라이 히로후미라는 유능한 일본 배우로서 대하고 소비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범죄자가 되자, 박경배라는 한국 사람이라고 일본 사회는 ‘강조’한다. 문제가 있고 잘못이 있는 사람은, 우리 일본인과는 다른, 우리 일본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타자화하고 배제하는 시스템이 작동하는 느낌이다. 일본 사회에 기여할 때는 아라이 히로후미였다가 사회에 해악을 끼치면 박경배가 되는 것일까?
법적인 조치를 취하는 대상이므로 본명을 밝혀야 하고 또 그것을 보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들은 반론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회에서 사실상 같은 ‘일본인’으로 살아오던 누군가를 언제든 이렇게 배제하고 타자화 할 수 있는 준비태세에 섬뜩함을 느낀다. 받아들이고 통합하고 책임지고 그래서 존중받는 사회가 아니라, 언제든 바로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내몰 수 있는 사회.. 편협함을 넘어 어떤 무서운 지점을 보게 된다. 그 속에서 자이니치들은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