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거와 많이 다른 일본-10>>
도쿄 우에노 공원 입구에 우뚝 서 있는 동상, 사이고 다카모리다. 소박한 옷차림에 종아리를 드러내고 사츠마(가고시마) 견을 끌고 토끼 사냥하러 가는 촌사람의 모습.
지금의 일본을 만든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고, 메이지 정부 최초의 육군대장이면서도, 결국 메이지 정부에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이끌다 최후를 맞은, 화려하고 비장한 그 인물이다.
우리에게는 조선을 당장 침공하자는 정한론을 주장한 인물로 아주 ‘널리’ 알려진 탓에 분노와 열패감을 느끼게 만드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싫은’ 인물 아닐까 싶다.
이웃나라를 무자비하게 침략한 일본의 이미지에 가장 부합하는 개인으로 그를 바라보다 보니 아주 자연스럽게 호전성과 침략의 코드를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읽어낸다.
같은 인물이나 사안을 놓고 한일의 평가는 매우 다른 걸 넘어 정반대인 경우가 종종 있다.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라 칭하는 그들의 평가처럼 말이다.
불행한 역사를 공유한 양국으로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하여튼 사이고 다카모리한테서도 도저히 화합이 불가능한 평가의 차이를 보게 된다.
우에노 역에서 전철을 타고 30분가량 이동해 타마치 역으로 가보자. 미츠비시 자동차 본사 건물이 서 있다. 지금은 그 흔적도 찾기 힘들지만 이곳은 막부 말기 긴박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군사정변을 일으킨 메이지 유신 세력과 기존 권력, 막부 측이 대결전을 앞두고 막판 협상을 벌였던 곳이다.
막부의 대표는 카츠 카이슈라는 사람이고 유신세력의 대표가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두 사람은 도쿄를 전쟁터로 불바다로 만들 수 없다는데 생각을 같이 하고 이른바 ‘무혈 개성’이란 결론을 도출해냈다.
에도(도쿄) 성을 열어주고 대신 도쿠가와 막부가의 후일을 보장해주는 일종의 빅딜이 이뤄졌고, 도쿄인들은 전쟁의 비극을 피했다. 실제로 막부 측은 협상 결렬에 대비해 도쿄에 불을 지르는 초토화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당시 도쿄 주민 150만 명의 목숨을 건진 주역으로 추앙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고, 조용한 기념비가 이를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 지금 도쿄인들에게 사이고 다카모리는 평화의 상징인 것이다.
자 이제 다시 동상을 바라보자.
일본인들이 저 동상에 의미 부여를 하고 애정을 갖는 이유를 이제는 좀 알 거 같다. 제작자 타카무라 고운이 사이고의 특징인 입술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마지막까지 고민했고 제막식에서 미망인 이토가 남편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고 말해 또 다른 논란이 일기도 했다는 등의 뒷얘기는 보통의 일본인들이 이 동상, 아니 이 인물에 그만큼 관심이 많다는 뜻이다.
일반인들이 저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 메이지 정부에 반기를 들었음에도 메이지 정부는 사후 그의 역적 오명을 벗겨주고는 동상을 세워줬다.
대신 아주 세심한 조치를 취했다. 높이 3.6미터의 거대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도대체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사람들은 흔히 그의 고향인 가고시마를 바라보는가 생각하지만 실은 일본 궁성을 향하게 만들었다. 살아서 반란을 꾀했어도 죽어서는 유신세력과 일왕에 충성을 다하라고 주문을 외듯이 말이다.
우리가 전쟁과 침략의 냄새를 맡게 되는 사이고의 동상에서 일본인들은 평화와 소박의 이미지를 읽고 있다. 같은 걸 보고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거리는 참으로 멀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평화를 지킨 사람으로 추앙하고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라 부르는 그들의 상식, 불편하지만 바로 이런 그들의 상식을 직시하는데서 새로운 출발점이 혹시나 마련되는 거 아닐까 막연히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