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거와 많이 다른 일본-5>>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일본은 상하이 사변, 즉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에서 승리한 뒤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 전승 축하 행사를 갖게 된다. 행사일은 일왕의 생일. 일부러 자신들의 기념일에 맞춰 극적 효과를 한껏 끌어올리려는 의도였다. ‘불순세력’의 공격 위험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자신들의 힘과 의지를 과시하려 했던 잔치 마당에 식민지 청년의 폭탄이 날아든다. 윤봉길 의사의 투척으로 잔치마당은 난장판이 됐다.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등 요인 여럿이 죽거나 다쳤다. 당시 주중공사였던 시게미츠 마모루도 현장에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최절정기에, 45세 한창 나이인 제국의 외교관 시게미츠 마모루는 일본 팽창의 힘을 상하이 하늘 아래서 느끼고 있었다. 윤의사의 투척에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 시게미츠 마모루는 일제 팽창의 상징이자, 식민지 민중의 저항의 과녁으로서, 역사적 장면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무대에서 그의 두번째 등장은 그로부터 13년 뒤인 1945년 9월 2일 도쿄만 앞바다에 정박 중인 미주리 함정, 일본의 항복 조인식 자리였다. 미 해병이 도열한 가운데 점령군 총사령관 맥아더 앞에서, 일본을 대표해 서명하는 이가 바로 시게미츠 마모루 당시 외무대신이다. 미국의 위력 앞에 납작 엎드린, 무너진 일본을 대표한 시게미츠 마모루는 이 조인식 뒤 전범 용의자로 미군에 체포됐다. 1945년의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는 ‘패전 일본’을 상징하면서 초라한 범죄자로 추락한 것이다. 역사의 도도한 물결에, 팽창의 일본이 전범국가 일본으로 무너지듯, 시게미츠 마모루도 그의 조국과 궤를 같이 하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냉전의 격화 속에 일본이 살아난 것처럼 그도 다른 전범들과 함께 곧 석방돼 승승장구하며 다시 세상의 주역으로 나선다. 그 화려한 재기의 흐름에서 세계의 관심을 사로잡는 장면에 그는 또 다시 등장한다. 1956년 12월 18일. 일본의 유엔 가입이 결정된다. 패전 6년 만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패전의 굴레에서 벗어나더니, 다시 5년이 지나자 이제는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당당히 자격을 회복하는 순간이었다. 동서의 가교가 되겠다는 유엔 가입 수락연설을 하면서 일본을 대표해 유엔의 일원이 됐음을 선언한 이가, 바로 다시 외무대신이 된 시게미츠 마모루였다. 그는 유엔본부 마당에 일장기를 직접 올리는, 일본인에게는 더 없이 감동적인 장면에서 주역의 영광을 맡았다. 시게미츠 마모루는 면죄부 받은 일본을 상징하는 주인공으로, 그의 조국과 함께 반성 없이 화려하게 부활했다.
침략과 몰락과 부활.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는 비단 시게미츠 마모루 한 개인의 삶만이 아니고, 다른 일본인들 그리고 일본 사회 전체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상대의 저항을 짓밟고 무자비하게 침략해나가고, 그러다가 몰락해 얼굴을 바닥에 닿을 정도로 엎드리고, 다시 급변의 국제정세 속에서 ‘한 것도 없는데’ 면죄부를 얻어 당당해진, 숨가쁜 일본의 변신. 그 변신이 시게미츠 마모루의 삶에서 압축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그리고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전범재판을 받아들이고 전쟁을 반성한다고 하지만 진정한 단절이 있었던가? 시게미츠 마모루는, 아니 일본 사회는 그 격렬한 변신 속에서 이전 시대와는 다르다는 선언이 있었던가? 단절하라는 추궁이 없었는데 참회하라는 추궁이 없었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그대로인데, 그래서 생각이 그대로인데,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평가가 바뀔 수 있을까? 침략의 주역이 항복의 주역이고 다시 부활의 주역인 나라에서 반성의 진정성을 어디에서 찾아야할까? 목숨을 던져 침략자에 저항한 식민지 청년과 그 폭탄을 맞고도 영광의 삶을 다 살고 간 제국의 외교관...그 두 삶이 묘하게 겹쳐지는 임정 백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