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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Feb 28. 2019

도쿄타워에서 한국전쟁을 본다

<<보이는 거와 많이 다른 일본-1>>



거대한 붉은 철골의 질감이 압도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도쿄타워는, 도쿄의 상징 치고는 아무래도 투박한 냄새가 난다. 늘 이곳을 지날 때마다 도쿄의 상징으로는 한발 늦는 느낌이라고 할까, 지금의 도쿄를 나타내는 장소로 2% 부족한 것 아닌가 생각해왔다.


이미 도쿄타워의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높이를 자랑하는 스카이 트리에 최고의 지위도  내줬다. 도쿄를 “전망”하고 싶은 사람들은 도쿄타워로 올라가지 않고, 스카이 트리나, 혹은 롯폰기 힐즈 전망대, 도쿄 청사 등에 올라, 도쿄타워를 포함한 경치를 감상한다. 명색이 전망대이면서도 뭔가를 바라보는 장소보다는 오히려 ‘전망되는 장소’로 “풍경화 배경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절대적으로 돌출한 발군의 존재에서 고층건물에 매몰되어가고 있다 ‘는 설명은 도쿄타워의 변화된 위상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일종의 퇴락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것이다.


도쿄타워 (도쿄타워 홈페이지) 


그럼에도 여전히 도쿄를 표현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고, 퇴락이 그렇게 안타까운, '주인공' 도쿄타워는 도대체 뭐였을까?  


본명, 도쿄전파탑. 높이 333미터. 324미터인 파리의 에펠탑보다 조금 높게 지어 세계 최고라는 명함을 얻고, 완공된 해인 1958년 즉 일본 연호에 따르면 쇼와 33년. 그 숫자에 맞춰 333미터로 만든, 지극히 계획적이고 의도된 건축물이다. 착공이 1957년 6월이고 이듬해 12월에 완공했으니 불과 1년 반 만에 세계 최고의 철탑이 위용을 드러낸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탑이 올라가는 모습을 기억하는 어느 일본인은 “매일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이 1미터씩 철탑을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라고 감격스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매일 철탑을 끌어올리는 보이지 않는 손, 그 손은 철탑 만이 아니라 일본 경제와 일본인의 자부심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도쿄타워가 완공된 즈음 일본에서는 상징적이고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이 잇따라 들어섰다.


2년 전인 1956년에는 155미터의 초대형 댐인 사쿠마 댐이 완성되고, 1957년에는 남극에 쇼와기지가 건립됐다. 그리고 1958년에는 혼슈와 규슈를 연결하는 해저터널 칸몬 터널이 완공됐다. 이 터널은 전쟁 중인 1937년에 착공했으나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공사가 중단됐다가 1952년에 공사를 재개해 완공한 것이다. 전쟁의 기억을 잊고 패전으로 인한 지체를 씻어버렸다는 증거들이 여기저기서 완성되는 상황, 그 마무리가 수도 한복판에 들어선 도쿄타워인 셈이다.

 

1957년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 도쿄타워 (주간 이코노미스트) 


그런데  이 무슨 느닷없는 인연인가? 일본인들에게 가장 특별한 도쿄타워는,  한국과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


도쿄타워는 모두 4000톤 이상의 철강이 투여된 철탑이다. 이 어마어마한 철강 재료를 확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철강을 끌어 모으는 중에 마침 이웃나라의 상황이 관심을 끌었다. 치열했던 전쟁이 막 끝났고, 전차를 비롯해 고철이 된 전쟁 장비가 지천에 널려있던 그런 한국 말이다. 미군으로서도 이 고철덩어리들을 모두 본국에 가져가 수리하거나 재생하느니, 현지에서 간단히 처분하는 게 효율적인 상황이었다.


일본 민간업자들은 한국전쟁에서 사용된 전차 90대가량을 비롯해 고물이 된 군사 장비를 사들여, 철강으로 재생했다. 그리고 도쿄타워 공사에 투입했다. 한국에서 온 미군 전차는 대전망대 윗부분에 투입됐다고 한다.


한국전쟁에서 사용된 전차와 무기였다면 이름 없는 수많은 남북 젊은이들의 피와 눈물이 얼룩져 있지 않을까.  한국인들의 형언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몸으로 기억하는 철 덩어리가, 근사한 타워의 한 부분이 돼 눈부신 일본인들의 발전을 지금까지 지켜봐 온 셈이다.


일본이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부흥에 박차를 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접국가에서 벌어진 참혹한 전쟁이 일본에게는 전쟁 특수와 수출의 확대라는 선물을 가져왔다. “한국이 아니라 베트남 정도에서만 전쟁이 났더라도 이런 특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일본인 스스로 고백하는 것처럼, 전쟁 특수는 온전히 일본의 활력으로 이어져, 공장이 다시 돌아가고 일자리는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고,  달러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1946년 조사에 따르면 일본 아이들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놀이는, 암시장 놀이, 판판 놀이(판판은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 여성을 지칭) 데모 놀이였다고 한다. 불안함과 어두운 시대상을 설명하는 조사였지만,  불과 10년 만에 그 글레를 벗어던지고 일본 경제기획청은 1955년 “이미 전후는 끝났다”라고 선언한다.


한국전쟁을 놓고 한반도에서 카미가제(신풍, 고려와 몽고 연합군이 왜를 공격했으나 태풍에 좌절된 걸 놓고 신풍이라고 이름 붙임)가 불어왔다고 한 언급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그들 역시 늘 기쁜 행운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도요타 사장은 생산이 40%나 늘자  회사를 위해 잘됐다고 기뻐하면서도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을 기뻐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뒤섞인 감정을 느껴야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어느 재일조선인은 참담한 소회를 이렇게 증언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철과 구리 알루미늄 등 모든 금속이 폭등했다. 같은 민족이 벌이는, 피로 피를 씻는 싸움이 역설적으로 재일조선인들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 줬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에서는 해방의 환호가 있었고, 일본에서는 일왕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일본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견디기 힘듬을 견디고, 참을 수 없음을 참아라”라고. 맥아더는 일본은 이제 4류 국가로 전락했다고 단언했다. 어마어마한 고통과 힘겨움이 밀려들거라 생각했으나, 불과 몇 년 만에 일본은 훨씬 더 풍요로운 생활이 시작됐고,  한국은 상상도 못 한 참담한 비극을 만나게 된다. 그 아이러니를 도쿄 타워의 철 덩어리는 기억하고 있을 테다.


패전국 일본과 나라를 되찾은 한국. 그런데 한쪽에선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지고, 또 한편에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도약의 흥분에 서게 된다.  이 기구하고 불편하고 슬픈 얽힘을  도쿄타워에서 발견해내는 건,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국인의 당연한 책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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