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물 복용 4개월 차, 그 날의 일기
약을 먹은 초반에는 고양감이 있었다. 나를 이해하게 되는 게 기뻤고, 약을 먹으면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첫 아이와 자주 부딪혔던 문제들도 아이와 함께 치료 받으니 좋아질 거라고 믿었다.
실제로 초반에 눈에 보이는 효과들도 있다고 느꼈다.
약을 먹은지 4개월 정도 됐을 때, 바닥을 경험했다.
정신과 약을 먹는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부작용이라고도 하는데, 그 당시엔 정말 절망적이었다.
약도 아무 소용이 없나. 나는 이것 밖에 안돼는 그냥 이런 인간인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우울감이 한 달 정도 지속됐다.
사실 발단이 된 사건이 있었다. 그 날의 일기를 이 곳에 올릴까 고민이 많았다.
바닥을 보이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 날의 일기를 조금 고쳐, 올려보는 것은
약물치료 초반에 겪었던 부작용 중 불안, 우울 등이 약에 적응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와 같은 과정을 겪는 이들이 우연히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그러니 너그럽게 보아주시길. ㅎㅎ
엄마랑 방아깨비가 잡고 싶다고 했다.
첫째 초등학교 방학식 날, 학부모회 주최로 근처 센터에서 물놀이 행사가 있었다.
아침부터 반 엄마들과 기분좋게 간식을 준비하고, 고생스럽겠지만 나름 마음의 준비도 하고 간 행사였다.
때마침 폭염에 모두 덥고 힘들었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즐겁기 때문에 아이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 내 잘못이었다.
평소에는 잘 지내고 신나게 놀지만 어떤 곳에서는 처음부터 좀처럼 적응을 못해서 가족 여행을 가도 언제나 첫째의 투정때문에 트러블이 잦다.
아니나 다를까 물놀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에 가고 싶어’가 나왔다.
처음엔 적당히 무시하고 적당히 달래주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관심사가 생겨 다시 재미를 붙이기도 하니까.
근데 상황이 좀 안 좋았다.
날이 너무 더워 나는 몇 몇 엄마들과 실내에 앉아 있었고, 아이는 나를 따라 실내로 들어왔다.
수영복이 젖어 에어컨 바람을 쐬면 추울 것 같아 가운을 덮어 주었고, 아이는 시무룩하게 내 옆에서 계속 ‘집에 가고 싶어’를 시전하고 있었다.
투정부리는 아이를 보고 엄마들이 한마디씩 거들어서
00이는 집에 가고 싶나봐, 어떡해 힘든가보다, 아픈가? 집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여러 말을 듣는 게 힘들었다. 서서히 신경이 곤두서는데 나름대로 컨트롤 하려 애쓰고 있었다.
엄마들 쪽을 등지고 돌아앉아 최대한 조용히 아이를 타이르고 있었다.
나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들을 찾아가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었는데,
굳이 내 심기를 건드는 엄마 한 명이 있었다.
아이가 집에 가자고 하면 좋은 거 아니예요? 힘든데.
아유 우리 애도 좀 집에 가자고 했으면 좋겠다.
엄마가 더 놀고 싶어서 안가는 거 아니에요?
가까스로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놓쳐지려 하는 찰나였다.
그런가? 아이가 집에 가고 싶다고 하면 좋은 건가? 내가 핑계를 대고 있나?
나 나름은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 중간에 동생들도 찾아서 여기로 데려와야 하고,
행사가 끝날 때까지 온 가족이 있으려고 아빠까지 왔다고.
집에 가면 또 아이랑 만화를 보여주네 마네 씨름해야 하는데 당연히 싫지!
그냥 넘기려면 넘길 수도 있었지만 알 수 없는 화가 계속 올라왔다.
초반에 아이랑 병원을 다니고 있다는 것을 몇 몇 어른들에게 생각 없이 말했다가
일일이 설명하는 일이 생각보다 복잡해서 안해야 겠다 마음먹고 있던 차였다.
부모들끼리 모여 아이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때도 있는데
일부러 안하려고 하니 그것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평소 지나치게 솔직한 편인 나는(이것 또한 ADHD의 증상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내가 무언가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 자체가 껄끄럽기도 했고,
지금 나는 과정중에 있는데, 이걸 속시원히 말할 수도 없어 사소한 질문에도 쉽게 답하지 못하고 헤멨다.
육아도, 치료도. 세상과 분리 되어 충분히 정리하고 재정비 한 후, 짠 하고 나타날 수가 없다.
무언가 깨달았어도, 한계에 부딪혔어도, 계속 계속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너무,
과민되어 있었다.
그 엄마가 우리 아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00아, 게임하고 싶어서 집에 가고 싶었구나. 그랬구나. 우리 ㅁㅁ이도 그럴 때가 있었어.
어쩌고 저쩌고.
나의 인내심은 바닥 났다.
아이에게 정색 하고 뒤뜰로 데려갔다.
게임하고 싶어서 물놀이다가 집에 간다는 게 말이 되니? 뭐하는 거야 이게. 다들 같이 놀고 있는데.
너 하고 싶은대로만 하겠다는 거야?
다그치면 마음이 돌아오기도 하는데, 아이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진심인 것이다. 정말 집에가고 싶어했다. 그렇다면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럼 집에 가. 대신 게임은 안돼! 책을 보던지 혼자 놀던지 해!
버럭하고 다시 엄마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저 먼저 가볼게요. 하하 하고
주차장으로 와 차에 탔다. 때 마침 밖에서 학교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있던 남편을 지나쳤다.
그 꼴도 보기가 싫었다.
지 애는 내팽개치고 남의 애들이랑 잘 놀아 주고 있네!
되돌릴 수 없다. 꼬일 대로 꼬였다.
차에 앉아 출발하려는데 눈치를 챈 남편이 따라와서 왜 그러냐고 묻는 말에 갑자기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감정기복 무엇. 안다. 금쪽이는 나다.
남편에게 상황을 설명하다보니 그라데이션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라
뒷자리 탄 아이에게 소릴 빽 질렀다.
너는 꼭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래야겠니!
다 잘 놀고 있는데 왜 꼭 그러는거야!
그래 이게 내 진심이었다. 이기적인 마음.
나도 누구 엄마처럼 만화도, 게임도 안보여주고 무결하게 아이를 키우는
당당한 FM엄마이고 싶다. 그런데 안된다.
오늘 하루 아이들과 다른 친구들과, 그리고 나중엔 동생들까지
나릅 즐겁게 보내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계획이 틀어졌다.
거기에 더해 약을 통해 좋아질 거라고 기대했던 것 만큼
나는 실망하고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유를 안다.
나는 ADHD니까. 그리고 너. 너는 나를 꼭 닮아 ADHD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차를 몰아 집으로 가는 동안 참지 못하고 독한 말을 뱉었다.
게임기 다 갖다 버릴거야. 만화도 못보게 갖다 버릴거야!
그 말에 난리 난 아들이 엉엉 울면서 그러지 말라고 소리친다.
나도 안다. 내뱉었지만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걸.
너무 화가나 하는 말일 뿐이지만 나는 그럴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이성을 찾아보려 하지만 찾아지지가 않는다. 어제 마신 맥주 때문인가. 피곤한 탓인가.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집에 다 와 갈 때쯤 나도 모르게 한 마디 더 독한 말을 내 뱉는다.
너 이제 학교 가지마. 단체 생활하지마. 그냥 집에만 있어!
후회는 돼지만 나올 대로 다 나와버려서 더 독한 말은 안해도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구제불능이다.
진정이 안돼는 아이는 게임기는 버리지 말라며 한참을 울다가
나의 침묵에 지쳐 숨만 헐떡 거렸다.
집에 오자 마자 이것 저것 부산스럽게 정리하는 척 하는 나를 향해 아이가 말했다.
엄마 미안해.
내가 못 들은체 하자 한 번 더.
엄마 미안해.
하… 괴롭다.
아이는 왜 사과를 하는 걸까. 좀처럼 나에게 뜻을 굽히지 않는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가 사과를 하자, 아이에게는 잘못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듣고 싶은 건 사과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내가 조성한 공포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몹시 괴로워 견디질 못하겠다.
앉혀놓고 대화를 시도했다.
너 왜 물놀이 싫어? 바다도 가고 계곡도 가고 너 물놀이 엄청 좋아하잖아. 도대체 뭔데.
아직도 숨을 헐떡이지만, 최선을 다해 대답해보려 하는 게 느껴진다.
그건.. 우리끼리 가서 노는 건 좋은데. 여기서는 좀 싫어.
여기서는 왜 싫은데.
그냥 호스랑 물총으로 얼굴에 물 튀는게 싫어.
너 저번에 친구들이랑 동네 수영장 가서 잠수도 했잖아.
그때도 좀 싫었는데 참았던 거야.
뭐? 너 계속 엄마도 안 찾고 엄청 즐거워보였는데 참았다고? 억지로 논 거라고? 말이 돼?
그때.. 그러니까.. 조금은 재밌었지만, 그땐 괜찮았지만 그냥 오늘은 싫었어.
내가 졌다.
나를 닮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어렸을 때 물놀이를 정말 좋아했는데, 누가 억지로 잠수 시키거나 물 튀기면서 물 싸움 하는 걸 무척 싫어했다.
지금도 수영을 못하는 이유다.
아이 마음을 알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또 내가 나쁜 년이구나…..
그랬구나. 미안하다. 엄마가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 미안해.
다들 물놀이 하는데 네가 게임하러 집에 가고 싶다고 하니까 엄마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었어.
근데 다음부턴 너도 엄마가 네 마음을 알 수 있게 좀 설명해줬으면 좋겠어.
친절하지 않은, 나름의 사과였다.
아이가 샤워 하러 가고 난 그 자리에서 앉아서 계속 운다.
심란하고, 심란하다.
꾸역 꾸역 남은 하루를 보내고 맥주 캔을 땄다.
자기전에 아이에게 다시 한 번 사과했다. 계속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몇 번이나 참았다.
나 오늘 왜이러지. 정말 약이 아무 소용이 없는건가.
그렇다면 나는 나아질 수 없다는 건가.
느즈막히 들어온 남편이 내가 맥주 마시면서 먹으면서 좋아하는 옛날 영화를 보고있는 것을 본다.
‘왜 이걸 봐..?’ 내 맘을 아는 듯이 이야기한다.
여보, 괜찮아. 다른 사람 신경 쓰지마. 여보는 잘하고 있어.
다른 사람들이 뭘 알아. 여보 진짜 멋진 엄마야. 자책 하지마.
위로가 됐다. 하지만 감정이 추스려 지지는 않았다.
남편도 잠든 밤, 양치를 하고 한 번더 아들이 자는 곳으로 간다.
습관처럼 사과했다.
엄마가 화내서 미안해..
아이도 잠결에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부은 눈으로 양치를 하다가, 아이가 물놀이를 하다 점점 겉돌던 모습이 떠올랐다.
수영장 옆 가로수 아래 풀 더미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내가 가까이 가자,
엄마 나랑 같이 방아깨비 잡자.
라고 두 번 정도 이야기 했던 게 생각났다.
괜히 더 모른척 했다. 그러면 다시 재밌게 놀지 않을까 생각했던것 같다.
그땐 외면하고만 싶었는데
갑자기 아이의 그 말이, 장면이, 가슴에 사무쳤다.
어떤 장면은 사진 처럼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물놀이가 불편해서 방아깨비를 잡는 모습이 자꾸만 눈 앞에 아른 거렸다.
아이가 마음을 잘 표현 하지 못 하는 건,
잘 들어주지 않는 나 때문이었을까..
00아.. 엄마한테 미안해 하지마. 사실 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싫고 불편한 건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닌데..
엄마가 화난 건.. 사실 엄마한테 화가 나서 그랬던 거야…
미안해 너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지랄도 병이다.
나같은 게 뭐한다고 애는 셋이나 낳아서.
나는.. 어쩌면.
내 병을 충분히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또다른 우월감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자의식 과잉. 이런 나에게 환멸이 느껴질 지경이다.
언제까지 나로 살아야해? 누구한테도 좋을 일 없는 나같은 게 뭐 좋으라고 이러고 사는 거야.
내가 환자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아직도 인정할수 없는 내 모습이 너무 많다.
아이에게서 날 닮은 그런 모습이 보일 때마다 내모습을 들킨 것처럼 당황한다.
나는 전혀 쿨하지 않은데, 쿨한 척 하는 것도 싫다.
아직도 나를 조금도 인정하지 못했다.
부정적인 생각이 휘몰아 칠 때면
아이들이 다른 집에서 태어났다면.. 하는 생각을 한다.
그 문장이 떠오르면 심장이 마르는 것 같다.
다른 건강하고 좋은 엄마였다면, 다르게 컸지 않았을까.
나는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아니다.
그런데 내 아이에게 엄마는 나 하나뿐이다.
절벽에 선 기분이다. 아무도 밀지 않지만 누군가 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다시 잘해보려는 마음을 가질수 있을까.
곧 내일이 될텐데, 나는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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