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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리 Nov 06. 2024

천재와 바보와 평균의 종말

내 아이가 ADHD인 건에 대하여…


<천재인지 바보인지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되어서 까지 꾸준히 들어왔던 말이다.



학창 시절 고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이자 수학 선생님이셨던, 공교육 혐오자였던 나에게 유일한 좋았던 어른 선생님으로 기억되는 그분은 처음 배우는 수학 공식을 빨리 풀고 멍하게 칠판을 보고 있는 내게, ‘어.. 벌써 다했다고? 너는 수학을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잘한다는 뜻인가?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지만 그다음 수업 때부터는 이내 난관에 부딪혀 수포자가 되었다.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종종 떠올랐던 말은 ‘효진이는 머리는 좋은데 응용력이 떨어져!’라고 해맑게 웃으며 이야기하던 엄마의 말이었다. 그 말은 기분이 안 좋았지만 나도 모르게 스스로 ‘나는 응용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기며 살아왔다.


20대 때, 보컬 레슨을 잠깐 받은 적이 있다. 스승님은 음악을 정말 너무 잘하는 분이셨다. 내가 이미 밴드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나에게 화성학도 겸해서 가르쳐 주셨는데 나에게는 전혀 놀랍지도 않은 그 말을 똑같이 했다. ‘효진 씨는… 천재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요’ 그래도 반은 천재 같다는 뜻일까?


중학교 때 내 일기를 보고 국어 선생님이, 사물놀이 시간에 동아리 선배가, 내 그림을 본 교회 선생님이, 사진을 찍으면, 옷을 골라주면, 아이디어를 내면, 사람들은 다 나에게 이 분야에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때로는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지만 딱 거기까지, 더 이상은 아무 힘도 없었다.


스스로를 어느 정도 알게 되고 인정하고 있었던 20대 후반, 무언가를 배우게 되자 아니나 다를까 듣게 된 그 말이 너무나 생생하고 답답했다.


‘천잰데, 아무 쓸모없는, 저만 아는 영역에서 천재예요’


라고 속으로 혼자 답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분은 나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렇지 않게 “제가 좀 이해력이 떨어져요. 훗”라고 말했는데, 생님은 ‘제 생각엔.. 이해는 하셨는데 집중을 안 하시는 것 같아요’라고 아주 침착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때도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집중이라는 것이 하고 싶다고 되는 영역인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ADHD진단을 받은 지금의 나로서는 집중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이었다는 게 이해가 되지만 그 당시엔 나는 집중한다고 했는데 안 했다고 하니, 그냥 나는 이해력이 떨어지는 응용력이 안 좋은 수포자, 영포자, 국포자, 그냥 포자. 그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넘겼다.


아기를 키우면서 숨구멍이 필요해 배웠던 성인 영어. 그때 친해진 소중한 친구들은 나에게 어떨 때 보면 너무 논리적이고 똑똑해!라는 말을 했다. 꾸준히 논리적이고 똑똑한 사람이고 싶었는데 현실은 똥멍청이 었고, 수업에서 다 알아듣는 말을 나만 이해 못 해서 못 웃은 적이 많았고(한국말), 너무 피곤할 때는 아는 척하면서 따라 웃은 적도 많다. 이해력이 떨어지는 건 모자라다는 느낌이라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내가 서울대를 갈 것도, 의사를 할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라는 생각으로 우당탕탕 살아왔다.




성인 ADHA 진단을 받자마자 같은 병원에 큰 아이 진료 예약을 잡았다. 아이의 검사 결과를 듣는 중에 지능 검사 결과지에서 무서운 그래프를 보았다. 지능이 평균보다 꽤 높았고, 주의력은 현저히 낮았다. 내가 사람들에게  수없이 들어왔던 말을 그래프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나 정말 천재와 바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던 걸까. 그게 우리 아이일까.


그래프를 보는 순간에는 좀 겁이 났다. 내 아이를, 나 같은 삶을 살게 할 수는 없다. 절대 없다. 나는  K 맘이니까,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선생님 약 먹으면 좋아지는 건가요?”

“네. 좋아질 겁니다.”

“…. 그럼.. ADHD에도 경중이 있잖아요. 우리 아이는 어떤 것 같으세요?”

“음.. 중상 정도입니다.”

“네? 아니 학교에서 또래들과 별 문제도 없고, 밖에서 유난 부리며 사고를 치는 것도 아니고, 지능이 낮아서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닌데요..?”

“네.. 그런데 지능이 높은데 주의력이 이렇게 낫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더 이상한 일이기도 해요. 아이들은 지능이 발달하면서 주의력도 함께 발달합니다. 아이가 이런 격차를 보이는 것을 보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젠장. 괜히 물어봤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은 성인 ADHD인 엄마는 공감을 바라는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선생님, 그래도 지능이 낮거나 심리적으로 아주 불안한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니니.. 약 먹고 훈련해서 주의력만 좋아지면 더 좋아질 수도 있는. 뭐. 그러니까 더 나은 그런. 그런 거겠죠…?”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의사가 웃으면서 그럼요 그럼요 네네.라고 해줘서 아주 안심이 되었다.



아들, 너 검사했는데 되게 똑똑하다네.(아이에게는 그냥 뇌 검사 하는 거라고 말했다)

근데 집중하는 힘이 조금 부족하대. 집중 잘 되게 해주는 영양제를 먹으면서 노력하면 금방 잘할 수 있대!라고 거짓말로 한껏 포장을 하며 병원을 나올 때는 많이 심란했다. 아이에게 이런 약을 먹이는 것이 그동안 추구해 왔던 나의 육아관에서 벗어난 것 같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내 아이는 내 것도 아니고, 내가 책임질 수도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 그래프로 드러나버린 이 문제가 모두 나 때문인 것 같고, 아이의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그래도 막 결심을 하진 않았다. 나도 환자고 자신 없으니까.





그날 집에 돌아와 심란한 마음 때문에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고 집 안에서 하릴없이 서성대고 있었다. 책꽂이에 있는 책이 자꾸만 나를 노려 보는 것 같아서 외면하고 싶었다. ‘평균의 종말’이라는 책이었다. 어릴 적 그 어느 ‘평균’에도 속하지 못하는 나라는 인간이 적잖이 위로받았고, 내 교육관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는 책인데 아이의 약 처방을 받고는 그 책이 자꾸 나를 질책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기 검열이었다.


‘너 아이를 평균으로 만들고 싶은 거야? 네 아이 지능이 높다니까 좋은 거야? 결국 주의력이 좋아져서 네 아이는 잘났고 똑똑하다는 말 들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맘으로 약을 먹이는 거야? 평균은 없다며! 편견은 너한테 있는 거 아니야?’


아이와 병원을 함께 다니던 초반에는 답답하고 울적했다. 주변에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가 공부 잘 시키고 싶어 하는 별난 엄마 취급을 받기도 하고(굳이 시골 와서 아이를 키우는 나에게…), 아이는 멀쩡한데 내가 괜히 몰아세우는 것은 아닌지.


지금은 아니다. 내 아이의 문제와는 별개로 내가 하는 생각 중 많은 것들이 자기 검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감옥은 나 혼자 만든 것이고, 그것에서 나오기로 결심했다.

아이에게 약을 먹이고자 하는 명확한 이유도 있고, 나 또한 이 약에 평생 100% 의지하지 않고

언제든 아이를 위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면서 지켜보고 있다.


그래도 나는…


아직도 나는 기로에 서 있다. 평균을 버리지도, 인정하지도 못한 채 내 아이에게 ‘보통’이라는 말을 쓸까 말까 고민하면서, 평범하게 자라길 바라면서도 평범하지 않길 바라는 내 마음을 갈라놓지도 화해시키지도 못한 채, 그냥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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